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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_롱

『내가 고양이를 데리고 노는 것일까, 고양이가 나를 데리고 노는 것일까?』 솔 프램튼 (책읽는수요일, 2012)



구나 몽테뉴에 입문할 수 있고 『에세(essais)』를 찾아 봐야겠다는 생각을 할 수는 있지만 프램튼의 이 책으로 우리는 한껏 기대를 품은 채 더 기쁘고 더 달뜬 마음으로 몽테뉴를 접할 수 있다(진실로 나의 경우가 그렇다). 오늘날의 생각으로 보건대 몽테뉴는 하기 좋은 말로 '열린 생각' 혹은 '트인 생각'의 소유자라는 것이 자명한데, 프램튼이 적은 것을 발췌해 보자면 이렇다. 「인간과 동물은 비슷한 면이 많다. 그래서 우리는 여자들끼리 머리채를 붙들고 싸우는 모습을 '고양이 싸움'이라 표현하기도 하고, 팔을 크게 벌려 포옹하는 것을 '곰 같은 포옹'이라 말하기도 한다. 자신이 '새대가리' 같은 느낌이 들 때도 있고 (...) 일을 망치면 사람을 돼지, 닭, 소에 빗대어 욕을 퍼붓기도 하고 (...) 이렇게 갖가지 사례를 장황하게 늘어놓는 것을 두고, 말처럼 천방지축으로 뛰노는 꼴이라 말할 수도 있다.」 굳이 이 부분을 옮겨 적은 것은 다음 몽테뉴의 말로 명확해진다.





그들과 우리의 의사소통을 가로막고 있는 결함이, 어째서 그들만의 결점이며 우리의 결점은 될 수 없다는 말인가? 인간과 동물이 서로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여전히 어느 쪽의 잘못 때문이라고 말할 수 없다. 인간도 동물이 인간을 이해하는 정도밖에는 그들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지 않은가. 이런 관점에서 보면, 우리가 동물을 야만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처럼 동물도 인간을 야만적이라 생각할 수 있다.




몽테뉴가 고양이를 데리고 놀면서(비로소 이 책의 제목의 탄생에 관한 사정이 드러나는데) 「내가 고양이를 데리고 놀 때, 사실은 고양이가 나를 데리고 노는 것이 아니라고 어떻게 장담할 수 있겠는가?」 하고 느꼈던 것은 그의 사고방식 전반을 살펴볼 때 결코 우연이 아닌 것이다. 회의주의는 육화된 자아에서 벗어나 우리가 파악하지 못한 영역에 대해 가설을 세우기 위한 시도에서 비롯되는데, 몽테뉴의 회의주의는 기계적인 것이 아니라 기회와 상황에 따라 융통성을 발휘하는 유동적인 것이다. 그의 주요 관심사가 확실성이 아니라 '집(지역성)'이라는 개념이었던 것은 그러한 움직이는 생각들을 그러모으기 위한 거였다(생각하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하므로 생각한다). 바로 몽테뉴의 『에세』는 차이와 다름을 인정하는 책이다. 우선 그는 인간의 유사성 주변에 형성되어 있는 차이를 인정한다. 몽테뉴는 여행을 '타인들과의 접촉을 통해 두뇌를 문지르고 윤이 나게 닦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 책 서문에 나와있듯 특기할 만한 한 가지는 몽테뉴가 자기 주변에 있는 사물들을 토대로 하나의 철학을 정립했다는 것이다. 그의 철학은 우리의 천성적인 능력으로 길러지는 것으로서, 스토아주의나 독단주의, 의심 등의 인공첨가물로 오염되지 않은 개념이었다. 몽테뉴는 이성의 대성전에서 피난처를 찾는 대신 죽음이 생명을 할퀴는 물가를 샅샅이 뒤져가며 그곳에서 찾은 것에 자신의 철학적 피신처를 지었다. 몽테뉴가 보여준 자아 탐구 과정의 특징은 자신에 대한 인식이 사회 전반에 대한 책임 의식과 모순되지 않는다는 것인데, 그는 남에 대한 인식이 높아지는 것도 부분적으로는 자기 인식을 통해 가능하다고 보았다(아무래도 시종일관 데카르트와는 평행선을 달리는 기분이다). 그러므로 당연히 이 책을 읽는 것도, 또 몽테뉴를 읽는 것도 홀로 떨어져 외부와 교류하지 않을 때보다(이 경우도 때로는 좋긴 하지만) 다른 사람들을 탐구함으로써 그것이 곧 자기 자신을 연구하는 방법이 될 수도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