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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_롱

『구원』 자크 스트라우스 (민음사, 2013)


구원 - 6점
자크 스트라우스 지음, 서창렬 옮김/민음사


한 살짜리 애새끼가 대체 뭘 알 수 있겠나. 그래도 일단 내 쪽에서 접어줘야 할 것은 잭이 그 나이에 샴푸 병으로 자위를 했다는 건데, 이것만 봐도 나보다는 행동 발달이 좋긴 하다 ― 나이도 나이지만 대체 샴푸 병을 어떻게 써야 하는 건지도 모르겠다(알고 싶긴 한데). 행동 발달이 좋다는 건, 지(智)와 덕(德)까지 겸비할 수 있다는 건데, 나로 말하자면 지덕체에서 체(體)가 맨 앞으로 와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야말로 잭을 지지할 수 있는 요건은 갖춘 셈이다. 이것은 자신의 신체를 돌보는 방법을 알지 못한다면 기쁨도 슬픔도 제대로 느끼지 못할 거라는 생각에서 기인한 것으로, 예컨대 조콘다의 눈썹 같은 거다.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겠고, 없다면 왜 없는 것인지 아무런 설명도 없는, 누구도 설명해 주지 않는 것. 이 세계가 어떤 메커니즘으로 동작하고 있는지 그 누구도 설명할 수 없거나 설명하려 들지 않는 것. 이런 세계에 발을 디밀고 살아가고 있는데 누가 샴푸 병으로 자위를 안 할 수 있을지. 나는 전반적인 상황이 점점 나빠져서, 그것을 계기로 이전에 몰랐던 것을 배우게 되고, 나중에는 고통과 상실을 거쳐 서글프고도 멋진 과거를 추억하고야 마는, 그러니까 썩어 빠진 싸구려 성장 소설이라면 질색이다. 잭이 처한 세상이 『구원』의 그것이 아니었더라면 이 소설도 그렇게 됐을 거라고 자신할 수 있다(물론 나에게). 『구원』에 티핑 포인트는 없으며, 그것의 유의미한 가능성조차도 찾을 수 없다. 대신 덜떨어진 이스터 에그나 꾀바르지만 개개풀린 자질구레한 각론이 (그의 말에 의하면) 부비 트랩처럼 산재해 있다. 사람이 사람을 일단 싫어하게 되면, 이것은 거의 변할 수 없게 굳어 버리곤 한다. 죽을 때까지 그럴지도 모른다. 성공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으니 반드시 다른 사람들이 망해야 한다고 누군가가 그랬는데, 이런 식으로 타인의 불행과 자신의 처지 ― 스스로가 행복하지 않다 하더라도 ― 를 비교하고 나면 나는 ‘행복한 사람’이 되어 버리는 이치다. 마치 지구 멸망은 영화나 소설에서만 등장하므로 현실에서 만족할 수 있는 것처럼. 그러니까, 인간이란 족속은 본질적으로 그렇게 생겨 먹었다. 불행을 입은 타인이 죽을 정도의 위기에 봉착하지 않는 한은 그렇다. 반대로 내가 지옥에 떨어지게 됐을 때도 마찬가지. 친구 페트뤼스가 했던 것처럼 나 아닌 다른 남자가 내 물건을 주물럭거리는 정도의 위험천만한 상황 같은 거 말이다…… 라는 건 (반쯤은) 농담이고, 자기보다 멋지게 보이는 남자에 대해 묘한 질투심이 들어 그를 쫓아내지 않으면 당장이라도 죽어 버릴 것만 같은 느낌, 더군다나 그에게 나의 치부가 드러났다면 말할 것도 없다. ‘생긴 대로 살자’ 식의 사고방식을 탑재해 살고 있는 나로서는 온전히 용납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다른 남자들의 이런 복수 행태를 모르는 것은 아니다. 굉장히 멋진 여자와는 친하게 지내고 싶어 하지만 굉장히 멋진 남자는 도리어 멀리하게 되는 심리 말이다(여자도 매한가지 아닐까?). 그러나 이런 식의 같잖은 사유의 남발이라면 『구원』은 망한 것임에 다름 아니겠으나, 이런저런 사람들과 공존할 수밖에 없는 남아공의 상황이 더해짐으로써 마뜩잖은 것도 더 이상은 그렇지 않다. 수지, 수지를 갖고는 싶은데 어떻게 해야 자신이 수지의 마음에 들 수 있을지 모르는, 발육이 덜된 파락호의 느낌이랄까. 내가 보기에 잭과 수지는 평행선 두 개다. 퍼시가 끼어들지 않았더라도 그랬을 것이다. 왜? 열한 살짜리 애새끼가 대체 뭘 알 수 있겠냔 말이다. 다자이 오사무가 그러길 세상은 인간의 복수형이라던데, 아마도 당신이 태어난 그 순간부터 이 세계는 당신의 불알을 잡고 늘어질 것이므로 미련퉁이처럼 핼금거리다가는 큰일이 날 것이다. 그렇지 않을 리가 없다. 나를 잡아채려는 인간들을 떼어 내려고 할수록 그 손들은 더 옥죄어 오기 마련이고, 그러다 보면 부비 트랩을 건드리지 않을 수 없으니까. 흑묘(흑인)건 백묘(백인)건 쥐만 잘 잡으면 된다고? 허튼소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