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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_롱

『엿보는 고헤이지』 교고쿠 나쓰히코 (북스피어, 2013)


엿보는 고헤이지 - 10점
교고쿠 나츠히코 지음, 김소연 옮김/북스피어


가가 의도한 바는 '고헤이지 이야기'의 원형 그대로는 아닐 테고 ㅡ 고헤이지에게 있어 존재의 증명이란 발꿈치를 만지는 것일 텐데, 본인은 제 몸을 만질 수 있을는지 몰라도 타인은 그를 만질 수 없다. 고헤이지가 스스로를 이 세계에서 열외로 취급 받게끔 의도한 것인지 타의로 그런 선택을 하게 됐는지는 별 상관이 없어 보이고, 헛방을 표류지(주거지)로 삼은 이유도 그다지 관심이 가지 않는다. 사회의 구성원이자 가정의 구성원에 몸담지 않고 헛방의 문을 살짝 열어 두어 길쭉한 틈으로 밖을 내다보는 건 아베 고보가 만든 '상자인간' 같은 느낌이다. 상자인간 역시 상자에 뚫어 놓은 엿보기용 창문으로 세상을 내다보기만 할뿐 좀처럼 세상 속으로 뛰어들지 않는다. 별안간 들이닥치는 난처함이 아니라면, 어지간해서는 상자를 벗지 않는다. 고헤이지 역시 헛방에서 나올 기미가 없다. 단, 언제나 밖을 볼 수 있을 정도의 틈은 남긴다. 열외로 있으면서도 완벽한 고립만은 피할 수 있도록. 심술은 부리지 않지만(이게 심술일까), 차라리 잠복소의 경우라면 남에게 작은 도움 정도는 될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건 온갖 추위에 시달려 해충 알을 품은 채 끝내는 태워지고 마는 게 아니라 자신이 드러나지 않게 숨는 것밖에는 되지 않는다. 더구나 모습이 보이지 않도록 완전히 숨는 것도 아닌 바에야 할 말이 없다. 대동단결해 끌어낼 수도 없다. 만지고 싶지도 않으니까. 이래서야 고헤이지가 헛방에 갇힌 건지 다른 사람들이 밖으로 갇혀있는 건지 알 수가 없는 노릇이다. 어쨌든 이런 판국이니 다쿠로가 극단 공연에 고헤이지를 데려가려는 것도 억지 춘향에 다름 아니다. 고헤이지가 유령 연기만 잘하지 않았더라도 그가 헛방을 나가는 일은 없었을 테니까. 게다가 고헤이지는 사양은커녕 무르춤한 기색도 없다 ㅡ 정말이지 '상자인간'보다 더하다.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있지만 '자신이 여기에 있다는 척'을 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건지도 모른다. ……하필이면 왜 '엿보는' 것일까. 익명이라는 벽돌 뒤에 숨어있다고는 하지만 그 익명은 온전한 익명이 아니며, 또 언제까지고 방패막이를 끼고 살아갈 수는 없으나 본래 누구라도 보이는 쪽보다 보려는 심리가 강한 노릇이므로, 그러므로 타인을 피사체로 만들지언정 스스로는 엿보기를 당하고 싶지 않은 그 인식, 여기에는 엿보기를 비밀스럽지 않은 비밀 병기처럼 사용하는 까발려진 메커니즘이 있다. 더군다나 처음에는 고헤이지가 엿보더니 이야기가 진행됨에 따라 다른 이들이 고헤이지를 엿보기 시작한다. 사람과 세계의 싸움에서 도화선에 불을 붙이는 쪽은 세계가 아니라고 했는데, 물과 흙의 결합이 반죽을 낳듯 엿보는 고헤이지를 위시한 사람들은 조금씩 '관계'에 대한 작용을 경험해 나간다. 관계는 서로가 뭔가를 교환하기 바라는 여러 가치들이 상충되고 더쳐 그들만의 것이 된다. 엿보기의 필수 요소가 눈[目]이라면 조잘거릴 때 필요한 것은 입[口]이다. 입은 저주할 때만 쓰는 게 아니다. 부드러운 입이든 난폭한 입이든 대립자로서의 입이든 ㅡ 하물며 관조할 때조차도 말할 필요성이 있는 한, 보는 것 말고도 말하는 것 또한 관계에서의 하나의 매개가 된다. 몸[體] 역시 매한가지. 고헤이지가 헛방에 있으면서도 한 치 반의 틈을 남겨 두었던 것은 그곳을 통해 세계로 나가려는 마지막 원망(願望)이었을까. 누군가 말을 걸면 발꿈치를 만지는 것 외에 어깨를 들썩일 줄도 아니, 술래에게 나 여기 있소 하고 자백하는 게 아니라면 나는 댁들과 이렇게 관계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 주는 '엿보기 당함'이려나.






▲ 호쿠사이가 그렸다는 고헤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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