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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_롱

『선셋 파크』 폴 오스터 (열린책들, 2013)


선셋 파크 - 8점
폴 오스터 지음, 송은주 옮김/열린책들


러니까 책과 신발, 인형, 더러운 양말, 텔레비전, 우표첩, 색 바랜 매트리스 따위의 사진이 마일스에게 왜 필요한 것일까. 리처드 골드스타인이 부고란에 쓴 기사보다 비교적 덜 삽상하고 덜 정제된 그 사진들이. 허튼소리만 해대는 입정 사나운 꼰대처럼 혹은 임신하자 부풀어 오르는 배를 무시하지 못하고 망가져만 가는 몸에 경악했을지도 모를 메리-리처럼 ㅡ 이런 불행들을 막기 위해 애쉬튼 커처가 했듯 마일스에게도 과거라는 탯줄이 필요했을지도(어떤 의미로든). 잊힐 권리라는, 이 세계에서 휘발되고 싶은, 어찌 보면 추레할는지도 모르는 그 생각이 차라리 하루키의 『해변의 카프카』에서의 그것보다는 조금 더 명확하고 덜 불건전하다. 그래서 여기에 모리스의 시점이 간섭해야만 하는 이유가 존재할 법하다. 왜냐하면 필라가 말한 대로 『위대한 개츠비』의 닉 캐러웨이가 분(扮)했던 것을 이제는 모리스가 하고 있는 것에 다름 아니라고 할 수 있으니 ㅡ 어쩌면 더 확정적일지도. 전쟁 후 돌아와 팽(烹) 당한 병사들처럼 모리스는 불륜의 귀환병이 되어 팽 당했다. 저들은 자기가 만들고 잃어버린 걸 찾으려 하지만 그게 무엇인지 알 수 없는 노릇이며 모리스는 자기가 만들고 잃어버린 걸(마일스) 찾고 관찰하지만 섣불리 다다가지 못한다(어느 쪽이건 하루키가 만든 카프카보다는 덜 불손하다). 더군다나 그 빌어먹을 선셋 파크. 잿빛 지붕널에는 금이 가 있고 현관에는 조잡한 난간을 달아 놓은 그 집! 시간이 너무나 느리게 흘러가서 사람들이 시계를 찰 필요조차 없는 그 동네! ㅡ 외려 sunrise가 아니라 sunset이었던 것이 다행일까. 메리-리가 낳은 녀석은 상처를 입어 보아야만 한 인간이 될 수 있다며 연극을 하고 있고 마일스를 낳은 여자 역시 삶에서 연극을 하거나 연극 속에서 삶을 찾는다. 이런 판국에 인간은 여자의 몸에서 태어나니까 어떤 식으로든 닥쳐야 한다는 논리는 벤젠같이 역겨울 뿐인 거다. 언젠가는 '우리 생애 최고의 해'가 (다시) 올 거라는 믿음은 쉽게 부서지지 않지만 그렇다고 그 최고의 해가 어디선가 갑자기 비죽 튀어나온다는 확신도 없으니까(결말을 늘여 썼다면 이 소설은 엄청난 재앙이 됐을 것이다). 그러므로 모리스가 자신이 쓸 책 제목으로 메모한 <사람들이 책을 증오하는 나라에서 문학 출판하기>는 <사람들이 불행했던 과거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증오하는 나라에서 다시 불행을 이야기하기>로 바꾸어도 손색이 없을 듯싶다. 그러니까, 모리스의 시점이 반드시 필요했던 것이다(이건 이런 식으로밖에 할 수 없다). 이 세계가 빼앗아 간 뒤 반환하지 않은, 임의의 선택이라는 말로 잘 포장되어 지금으로도 포화 상태인 그 분기점에서야말로 ㅡ 오히려 자성(磁性)을 띤 대척점을 향해 오래달리기를 해야 할 필요가 있었으니 말이다.



덧) 과거라면 전쟁에 끌려갔을 법한 나이의 필라(그녀가 여자라 하더라도)가 이 소설의 실낱같은 빛이라는 것에는 동의할 수 없지만, 비중은 있되 발언권이 적었다는 것은 마음에 든다. 마일스를 부모의 곁으로 몰아넣은 장본인이 그녀의 언니라는 설정도 괜찮았고. 빙이 게이일지도 모른다는 것은? 흐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