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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_롱

『피로사회』 한병철 (문학과지성사, 2012)


피로사회 - 10점
한병철 지음, 김태환 옮김/문학과지성사


사. 이 단어가 가장 먼저 떠오른다. 아무래도 폴리 마칭어의 우호적인 것(friendly)과 위험한 것(dangerous)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나를 보고 있는 것만 같다. 이러한 세계는 경계선, 통로, 문턱, 울타리, 참호, 장벽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ㅡ 슈미트의 적(敵)을 떠올려 보라 ㅡ 만약 그런 의미를 넘어서게 된다면 오늘날에는 삶의 모든 영역이 '난교 상태'로 특징지어진다고도 할 수 있으리라.(p.15) 그러나 내가 이 두 가지 세계에 틈입해 교집합의 목록 속에 들어간 인간이라 느끼게 되는 것은 어찌된 일일까. 긍정성의 과잉? 일종의 비만 상태? 물론 오웰과 헉슬리가 보는 양상은 조금 다르나 그것에는 표면과 이면이라는 차이만이 있을 뿐이다. 정보의 차단을 두려워한 오웰과 과잉 정보로 자기중심적이게 되는 것을 두려워한 헉슬리. 오웰의 디스토피아에서는 인간들이 고통으로 통제되지만 헉슬리의 세계에서는 쾌락에 의해 지배된다. 그들은 인간을 파멸시키는 것의 주체로 각각 우리가 증오하는 것과 좋아하는 것이라 했다. 한병철 교수에 의하면 우리는 헉슬리의 세계에서 범퍼카를 타고 있는 중이다. 멜빌의 소설에 등장하는 바틀비에게서 탈락된 것이 주어인지 목적어인지, 아니면 하다못해 보조 동사 can이나 will 따위였는지를 나는 알지 못한다. 나조차도 의심스러운 까닭이다ㅡ 그러나 다시 한 번 저자의 주장으로 돌아간다면, 그는 오늘날의 사회인을 성과주체라 했다, 아마도 성능 없는 성과를 올려야만 하는 must라는 단어 하나만큼은 손에 꼭 쥐고 있는 것이 틀림없어 보인다.




노동사회, 성과사회는 자유로운 사회가 아니며 계속 새로운 강제를 만들어낸다 (...) 그렇게 인간은 자기 자신을 착취한다. 이로써 지배 없는 착취가 가능해진다. 우울증, 경계성성격장애, 소진증후군으로 고생하는 사람들은 나치 강제수용소의 무젤만(영양실조로 고통 받는 수감자들)과 유사한 증상을 나타낸다 (...) 우리는 후기근대에 신경 질환을 안고 살아가는 노동하는 동물 역시 일종의 무젤만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물론 이들은 강제수용소의 무젤만과 달리 영양 상태가 좋고 몸에 지방이 과다한 경우도 드물지 않긴 하지만 말이다.


ㅡ 본문 p.43~44




죄다 피로사회를 살아가는 피로한 인간들일는지. 부정의 부정을 통해 관철되었던 것들이 이제는 긍정의 긍정을 통하는 메커니즘으로 변한 것일는지. 그가 말하듯 '~해서는 안 된다' '~해야 한다' 즉 'No'로 대변되었던 규율사회에서 'Yes we can'이 지배하는 과다 긍정의 사회로 변모한 게 맞는 것일는지. 물론 이러한 성과사회(피로사회)는 우울증 환자와 낙오자를 만들어내기도 한다.(p.24) 저들은 하나같이 머뭇거리고 부정하고 생각하며 사색에 잠길 줄을 모르는 인간들이 되어버리기라도 한 것일까. 그는 여기서 잠시도 멈추지 않는 기계를 예로 들며 니체를 역설적으로 데려온다. 「활동적인 사람들은 보통 고차적 활동을 하는 법이 없다 (...) 이런 점에서 그들은 게으르다.」 그리고 다시금 파멸하지 않고는 바라볼 수조차 없는 근원적 이질성의 대상으로 메두사를 끄집어낸다(「메두사는 아마도 최고도로 극단화된 형태의 면역학적 타자일 것이다」). 그가 말하고자 하는 과다 긍정/긍정성의 폭력은 박탈보다는 포화를, 배제보다는 고갈을 자양분 삼아 자라나고 있는 것만 같다. 그에 의하면 병원, 정신병자 수용소, 감옥, 병영, 공장으로 이루어진 푸코의 규율사회는 더 이상 오늘의 사회가 아닌 것이 된다. 그것들은 모두 피트니스 클럽, 오피스 빌딩, 은행, 공항, 쇼핑몰, 유전자 실험실로 이루어진 사회로 대체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다시 한 번 복종보다는 성과를, 복종적주체가 아니라 성과주체로 불러야만 한다고 말이다. 실로 우리는 벤야민의 아케이드에서 한 발짝도 벗어나지 못한 것일까? 피지배의 속박 아래 복종만 하는 인간에서 노동하는 것밖에는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어리석은 인간으로.




니체라면 대중의 현실이 되려고 하는 인간형을 가리켜 주권적 초인이 아니라 그저 노동만 하는 최후의 인간이라고 했을 것이다 (...) 우울한 인간은 노동하는 동물로서 자기 자신을 착취한다. 물론 타자의 강요 없이 자발적으로 (...) 우울증은 성과주체가 더 이상 '할 수 있을' 수 없을 때 발발한다. 그것은 일차적으로 일과 능력의 피로이다. '아무것도 가능하지 않다'는 우울한 개인의 한탄은 '아무것도 불가능하지 않다'고 믿는 사회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ㅡ 본문 p.28




이것은 행복을 파는 가게가 있다면 돈을 주고라고 그것을 취하기 위해 안달복달하는 우리의 모습일지도 모른다. 과다한 노동과 성과는 자기 착취로까지 치닫고, 자기 착취는 자유롭다는 느낌을 동반하기 때문에 타자의 착취보다 더 효율적이다.(p.29) 그러므로 종국에 착취자는 피착취자와 동일한 의미를 지니게 되며 그들은 각성바지가 아닌 한 몸이 되고 마는 것이다(사유하는 것마저 '계산하다'는 말과 동일시된다). 그는 활동적일수록 더 자유로워질 것이라는 믿음이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 했다ㅡ 이것은 어딘지 모르게 자유의지 자체를 환상이라고 했던 샘 해리스의 말과 닮아있다. 그는 나르시스적 개인은 의도적으로 하나의 목표를 달성하거나 뭔가 완결하기를 회피한다는 세네트의 논의 또한 부정하는 쪽을 택하기보다는 더욱 확고히 하려 한다. 외려 어떤 목표를 달성했다는 느낌 자체가 결코 찾아오지 않는다고 말이다.(p.90) 그렇다면 피로사회로 상징되는 이러한 과잉 긍정과 과잉 활동에는 '중단하는 본능'이 반드시 필요할 것만 같다. 그게 아니라면 (과잉) 긍정을 부정하려는 시도라도 해보아야지.




도대체 어떤 빌어먹을 인간이 자명종 소리에 새벽 여섯 시 반에 깨어나 침대에서 뛰쳐나오고, 옷을 입고, 억지로 밥을 먹고, 똥을 싸고, 오줌을 누고, 이를 닦고, 머리를 빗고, 본질적으로 누군가에게 더 많은 돈을 벌게 해주는 장소로 가기 위해 교통지옥과 싸우고, 그렇게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 것에 감사해야 하는 삶을 기꺼이 받아들인단 말인가?


ㅡ 찰스 부코스키




저자가 아무리 칸트의 (인간에게 보상하는 기관으로서의) 신을 언급하며 그 신이 기만하지 않고 신뢰할 만한 존재라고 해도(그렇게 믿든 비꼬는 것이든) 나는 그 말 자체를 신뢰하지 않는다. 신은 그가 없애고자 하는 자를 일단 미치게 만든다고 하지 않았나. 그렇다면 처음으로 돌아가서 이 책과 저자의 사유는 피로사회의 정점에 있는 것인가 아니면 그리로 향해 가는 접점 언저리에 있는 것인가. 이러한 이야기는 사회라는 거대한 시스템 그러니까 대중이라는 다수의 무리에 의해 개인이 겁박되는 것이 전제되었기 때문일까. 개인은 (비록 영민할지라도) 힘이 없다. 사회라는 괴물에게 온전히 헤게모니를 넘겨준 채 거세되었을 뿐이다. 이 얄팍하고 무자비한 책을 맺는 그의 마지막 문장이 또렷한 것은, 나 역시 피로사회에 갇힌 피로한 인간이기 때문이라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우리는 죽을 수 있기에는 너무 생생하고 살 수 있기에는 너무 죽어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