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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_롱

『파계 재판』 다카기 아키미쓰 (검은숲, 2014)


파계 재판 - 10점
다카기 아키미쓰 지음, 김선영 옮김/검은숲


디서부터 시작해야 할까. 무엇보다 속독과는 거리가 먼 내 습성을 우선 탓해야 할 테지만, 든든하게 저녁 식사를 하고 나서 잠이 들 때까지ㅡ 꼭 이 정도의 시간이라면 깔끔하게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백 퍼센트 법정에서만 일어나는 일을 다루고 있으면서도 딱딱하게 굳은 느낌이 없고, 꽤 오래 전에 출간된 작품임에도 거리감이라고는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 현직 판사(동시에 그는 추리 소설가이다)마저 어느 작품보다 실제에 가깝고 법적 오류 또한 전혀 없다고 하니 이야기의 무대만큼은 구조가 완벽한 셈이다.



한 남자가 법정에 섰다. 두 번의 살인과 두 번의 사체유기. 그는 앞서 발생한 사건에서의 사체유기 한 건을 제외하고는 자신의 죄를 부정한다. 소설은 법원에 출입하는 법정기자의 시선으로 진행되는데, 그는 재판을 연극에 비유한다면 그것은 각본도 연습도 없는 즉흥극이라며 시간의 흐름에 따라 어떻게 움직일지도 알 수 없다고 단언한다.(p.182) 이 이야기도 법정이라는 제한된 공간 안에서 모든 동작이 이루어지고는 있지만 실로 다이내믹한 동선을 그리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특기할만한 것은, 주인공이 내연녀와 남편을 살해하고 두 시신을 유기했다는 죄목으로 피고석에 앉아있는 남자가 아니라 그의 변호를 맡은 젊은 변호사라는 점이다. 또 하나, 묘하게도 과거 텔레비전 프로그램 <무한도전>에서 다루었던 '죄와 길' 편을 떠올리게끔 하는 부분도 있다. 피고(명예훼손죄)의 주장에 신빙성이 있는지를 검증하기 위해 그와 잘 알고 지내는 증인을 소환하는 장면 말이다ㅡ 당시 극 속에서 증인은 피고에게 불리한 증언만을 쏟아내었다. 나는 그저 웃음을 유발하기 위한 하나의 장치라고만 여겼었는데, 이것이 실제 법정에서 원고 측이 사용하고 있는 방법론이었을 줄은 전혀 알지 못했다.





이렇게 피고인이 공소사실의 태반을 부정하는 상태라면 공판부의 검사도 뜻대로 다루기가 어렵다. 때문에, 먼저 피고인의 성격을 증명할 수 있는 증인을 몇 명 내세워 피고인의 말을 믿을 수 없다는 인상을 준 다음 범죄 사실을 입증한 전례도 내 경험으로는 몇 건이나 있었다.


ㅡ 본문 p.91




피고를 궁지로 몰기 위해 세 명의 증인이 법정에 들어선다. 그러나 주인공인 변호사는 그러한 증언들을 너무나도 간단히 물리치고 만다. 세 명의 타자(증인)가 날린 장타성 라이너를 외야수가 스탠드 코앞에서 깔끔하게 잡아낸 셈이다.(p.138) 과거 피고와 거래를 했던, 선물 거래 시장에서 일하는 증인이 말한다. 「시장에는 '팔고, 사고, 쉬어라'라는 말이 있다.」 그러나 피고석에 앉은 지쳐 보이는 남자는 발버둥 쳤고, 사랑했고, 애달플 뿐이다. 그는 말한다. 「저는 근거 없는 압박에 익숙해진 나머지 저항을 생각하지 못하는 인간입니다.」 대체 누가 멋대로 타인을 논하는가. 이 소설은 60년대에 출간된 것으로 인간이 인간에게 받는 모욕 중 '차별'을 매개 삼는다. 그러므로 겉표지에 적힌 카피마저도 살 떨리는 비수가 된다. '사람이 아닌 자의 이야기.' 이것은 작중에서도 그 근저가 되어 직접적으로 나타나는데, 피고의 애독서로 언급된 시마자키 도손(島崎藤村)의 『파계』가 그것이다ㅡ 더군다나 작가 자신도 매한가지로 이러한 맥락 속에서 살아왔으며 그 개인사를 투영하여 『파계 재판』을 썼을 것이다. 그나 피고가 죄인이라면 그들은 법이 아닌 세상이 만든 죄인일 터다. 그렇기에 더더욱 화자인 법정기자의 말대로 '생명을 지니고 유전하는 인간의 생활을 법률적인 칼날로 도려내는' 것이 양날의 검이 되어버릴지도 모른다는 염려가 생길밖에. 다만 구조적인 측면에서 아쉬운 것이 하나 있다면 변호인인 햐쿠타니 센이치로의 날카로운 변호의 뒷배에 재력(財力)이 풍부한 아내가 있었다는 점이다. 일개 변호사가 작품 속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변론을 조사하기에는 분명 무리가 있을 텐데, 아내의 수완으로 인해 그는 무적의 슈퍼맨처럼 그려져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가 증인을 심문하며 마술사의 금언(金言)을 언급하는 부분 ㅡ 오른손으로 미술을 부리려면 왼손으로 관객의 시선을 모아라 ㅡ 은 그래서 다소 빛이 바랜 느낌을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