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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_롱

『이런 이야기』 알레산드로 바리코 (비채, 2014)


이런 이야기 - 8점
알레산드로 바리코 지음, 이세욱 옮김/비채


는 것과 이름을 지어주는 것이 아마도 사람이 평생을 살면서 하는 일 가운데 가장 진지한 일(자동차에 이름을 붙이는 데에도)이라면, 울티모(마지막 사람)를 아이의 이름으로 낙점한 부모의 의중에는 신비스런 열의와 든든한 신뢰가 깃들어 있었는지도 모른다. 냄새의 자취에는 바람이 불지 않고 마음의 행로에는 질서가 없다. 울티모의 앞에는 구애되는 것이 없으며 그의 등 뒤에는 이미 걸어 온 곧게 뻗은 길과 위험한 굽이들이 있다. 「우리가 하는 일이란 그저 남들이 다 끝내지 못하고 남겨둔 일을 마무리하는 것이거나 다른 사람들이 우리 대신 마무리할 일을 시작하는 것에 지나지 않다.」(p.93) 소설에서는 엔진이 고장 나서 도로변에 차를 세운 레이서나 사고를 당해 죽은 레이서를 지칭하는 것으로 '레티라도(물러난 사람)'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지만, 이것을 리베로 파르리의 말에 대입하자면ㅡ 레티라도의 뒷일을 조몰락거리려 하는 것이 우리가 하는 일이거나 혹은 다른 이들이 시작하고자 하는 일을 벌여 놓은 게 바로 다름 아닌 레티라도(우리)인 것이다. 처음 보는 건물들의 블록을 돌아나가면 ㅡ 왼쪽일까? 오른쪽일까? ㅡ 도시 전체가 안개에 휩싸여 있을지 깨끗한 진열창 안에서 공작 깃털 눈알 문양을 만들어내는 여러 개의 불빛들이 있을지 알 수 없는 ㅡ 설령 같은 곳을 뱅뱅 돌다가 '빌어먹을, 여기가 어디지?' 하는 질문이 튀어나올지언정 ㅡ 이 물음이 경이로운 이유는 ㅡ 답이 없고, 답을 찾을 수 없으며, 이미 만들어진 그 무엇도 없기 때문이다(레티라도 전이건 후이건 결국에는 모두가 같은 레티라도일 뿐이다) ㅡ 울티모는 활주로를 걸으며, 제 호주머니 속에 있던 흙을 꺼내 동생의 호주머니로 옮겨 준다. 말라깽이에다가 눈은 쥐색이며 늘 주사를 맞아야 하는 사람처럼 허약해 보이는 울티모는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 있으면 그것을 기억에서 지워버린다. 자기가 무엇을 위해 태어났는지를 알고 그것을 해내는 것에만 진정으로 살아 있음을 느끼고 그 앞과 뒤는 그저 기다리거나 추억할 뿐이다.(p.327) 그가 꿈꾸던 막연한 미래는 천천히 걸어서 왔지만 그는 세상에서 훔쳐낸 곡선들로 자신만의 길을 만들었다. 그리고 길 위에서 살았고 길 위에서 사랑했으며 길 위에서 죽고 자기만의 길 위에서 꿈을 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