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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_롱

『위대한 유산(전2권)』 찰스 디킨스 (열린책들, 2014)


위대한 유산 - 상 - 10점
찰스 디킨스 지음, 류경희 옮김/열린책들


대한 조(지프) 가저리의 말대로 인생이란 너무나도 많은 부분들이 하나로 용접되어 결합된 구성물이라는 것이 확인되었다. 책장(冊張) 하나를 통째로 채우고 있는ㅡ 스스로를 '우둔하다'며 깎아내리기를 주저하지 않는 견실한 대장장이 조의 이 말은 그러나 동시에 '하나로 용접된' 모습뿐만 아니라 참으로 다종다양한 삶과 인간들의 불가해한 양상 또한 (때로는) 분별 있는 불순물로 작용한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을 터다. 그러므로 핍을 둘러싼 군상에 그치지 않고 모든 인물에 핍의 얼굴이 있고 핍에게 역시 그 모두의 얼굴이 스며들어 있는 것이다. 열 살도 안 되었던 허깨비 같은 신사 핍은 스물을 넘겨도 여전히 어린 날의 핍에 머물러 있으며 땀 흘리는 노동에서 눈을 돌리고 제 매형으로부터 인간적 신의를 거두어 버리지만 끝에 가서는 교훈적 각성을 통해 새로운 유산을 얻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야말로 자신에게 유산을 물려주겠다는 미지의 은인이 미스 해비셤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게 된 후 그녀에 퍼부어댔던 통렬함은 실은 핍 그에게 더 잘 어울린다. 「……저지르신 잘못 중 한 조각이라도 본래의 상태로 되돌릴 수 있으시다면, 백 년이 지나도록 과거를 슬퍼하시는 것보다 그 일을 하시는 게 더 나을 것입니다.」(하권 p.257) 그러나 시골 쥐 핍의ㅡ 실체를 보지 않고 환상 속에 머무르려는 속물근성ㅡ 어지간한 쇠망치를 동원해서는 누레진 머릿속을 비울 수 없는가 보다.





「우리는 지금 내가 손을 적시고 있는 이 강물의 밑바닥을 볼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몇 시간 후에 벌어질 상황의 밑바닥을 볼 수 없단다. 또한 내가 이 강물을 손으로 잡을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 몇 시간의 흐름을 손으로 잡을 수도 없단다. 강물이 손가락들 사이로 흘러가면서 사라지는 게 너도 보이겠지!」


ㅡ 하권 p.322




인간은 누구나 하등의 이유 없이도 우쭐해지고(내가 그렇다) 젠체하며 뒷짐 진 채 비웃음을 흘리는가하면(바로 내 모습이다) 자신의 친구를 부끄러워하거나(나도 그런 때가 있었다) 인간관계의 오만에서 좀처럼 발을 빼지 못하기도 한다(죄다 내 이야기 같다). 우리의 필립 "핍" 피립(Philip "Pip" Pirrip)이 이미 새티스 하우스에 몰려든 미스 해비셤의 친척들을 관찰하며 그들의 속물근성을 알아챘다 하더라도, 그럼에도 그가 제 손에 무엇이 들려있고 많은 양의 피가 들어있는 제 심장에 어떠한 가치관이 깃들어 있는지 하는 것에는 주의를 기울이지 못했던 것처럼 말이다. 주체는 오롯이 그 주체로서 존재할 수 없고 타자라는 매개체를 통해서만 만지고 냄새 맡고 눈으로 확인하고 제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것처럼 핍 역시 자신과 똑같이 생긴 이들(만)을 재단하여 가름한다. 그리고 그는 제 은인이자 신사 흉내를 낼 수 있도록 부유함을 물어다 준 탈옥수 매그위치의 존재를 통해 낙담과 반성을 동시에 경험한다. 결국 핍은 스스로와 드잡이를 한 셈인데(누구든 그러하겠으나), 한바탕 소나기에 홀딱 젖고 난 뒤에야 자신(인간)에게 있어 중요한 가치가 무엇이고 인간(자신)을 이해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과정을 거쳐야 하는지를 어렴풋하게나마 자각하게 된다. 제 광대 짓의 근원이었던 것의 면모를 알지 못했을 때에 비해 이제는 그 실체를 또렷이 목도하고 있는 것이다ㅡ 손가락 사이로 흐르며 사라져가는 강물을 비로소 볼 수 있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