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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_롱

『다산 정약용 평전』 박석무 (민음사, 2014)


다산 정약용 평전 - 8점
박석무 지음/민음사


자에게 거슬릴지도 모르는 말을 좀 하자면, 내가 보기에 이 『다산 정약용 평전』은 편협한 것이 사실이다. 진실로 다산이 흠잡을 데 없는 평가를 받아 온당하다면, 세평이나 이름난 이들이 다산을 추어주는 시각 역시 매한가지였다면, 그의 인물됨을 이런 식으로 그려서는 다소 (필시) 곤란하다. 그런 만큼 이 책을 읽은 사람으로서 보건대 이쪽 또한 책에 대한 평가를 내리는 것에 곤란함을 겪고 있다. 다산이라는 인물에 티끌 하나 보이지 않는다 하더라도, 저자가 보는 다산은 이 세계에 존재하는 유일한 성인군자임에 틀림없다. 그만큼 칭찬 일색이다. 그렇다면ㅡ 내가 얻은 정보라고는 이것밖에 없으니, 저자와 책에 대한 평보다는 책 속에서 현대로 직핍해 온 '어질고 현명한' 다산에 대해서만 끼적일 수 있을 따름이다.





……그들에게 목민관의 직책을 내려 주었던 것만으로도 그들은 은혜롭게 여겨야 할 일이건만 백성의 재물을 빼앗고 탐관오리로서 엄연히 법을 범했는데 그대로 놓아주고 죄를 묻지 않으신다니, 어리석은 신의 소견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대체로 법을 적용할 때는 마땅히 임금의 최측근으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경기 암행어사 복명 후의 일을 논하여 올리는 소」




실로 아이러니 한 것은, 나는 저 신유옥사로 인해 유배된 다산이 그 시기에 남긴 저술로 인해서나마 그를 알아 왔다는 점이다(그렇다고 당시의 탄압을 두둔할 생각은 없다). 그가 줄곧 피력해 온 공정한 수사와 재판, 인재 등용의 공정성, 문벌과 신분제 그리고 지역 차별의 타파, 빈부의 불균등 해소 등 (실현성의 여부는 차치하고라도) 일표이서를 관통하는 그의 의지와 주장은 지금 보아도 정의로운 것이며 공평한 처사다. 그러므로 저자가 이러한 다산으로부터 현대의 부조리를 겹쳐 보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그는 신유옥사의 본질을 다음과 같이 보았다. 겨자씨만큼의 잘못을 저질러도 끝내 죽이고 말던 시파와 벽파의 싸움에서 처참하게 패한 다산이 정치적 싸움의 희생물임을 그 스스로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으며 그렇기 때문에야말로 요즘 말로 '대통합'의 그날을 희구했다고 말이다.(p.348) 그러고는 요순 같은 성인 임금들도 민정을 살피기 위해서는 꼴 베는 나무꾼에게 나라 다스리는 일을 상의했고, 농부나 상인들에게 물어서 백성들의 불편함이 무엇인가를 알아내는 일이 정치의 요체라며 '소통'이란 말의 의미를 잠시도 동을 두지 않고 덧붙인다. 이것은 이미 말한 다산의 주장과 함께 <성(性) + 행(行) = 덕(德)>이라는 사유 체계ㅡ 다시 말해 아무리 훌륭한 성품이나 덕성을 갖추었다 해도 그것만으로는 어떤 결과가 나올 수 없으므로, 착한 성품을 행동으로 옮겨야만 덕이 될 수 있다며 실천을 강조하는 자세를 본질로 삼은 것을 크게 칭찬할 만한 것이다. 이것은 주자학의 성리학적 사고와는 다른 것인데, 소위 사단칠정(四端七情)의 문제에서도 역시 비슷한 견해로 드러난다. 이를테면 주자는 인의예지를 모두 사람의 마음속에 들어있는 이치라 해석했지만 다산은 달랐다. 그는 측은한 마음(惻隱之心)이 행위로 나타나야 인(仁)이 되고, 수오의 마음(羞惡之心)이 행위로 나타나야 의(義)가 되고, 사양의 마음(辭讓之心)의 행위로 나타나야 예(禮)가 되고, 시비의 마음(是非之心)이 행위로 나타나야 지(智)가 된다는 해석을 내놓은 것이다. 그러니 이것을 입말로 하면, 인의예지의 공효는 행위와 행동으로 나타나지 않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주장이었다(지금, 행동하지 않는 철학자가 얼마나 많은가!). 유배 당시의 다산이 고향에 두고 온 두 아들에게 보낸 글에서 짐짓 일러 주는 태도 역시 참으로 좋다. 「재물은 자손에게 전해 준다 해도 끝내 탕진되고 만다. 다만 가난한 친척이나 가난한 친구들에게 나누어 준다면 영원히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 왜 그런가 하면 형태가 있는 것은 없어지기 쉽지만, 형태가 없는 것은 없어지기 어렵기 때문이다.」 ……난사람은 난사람이라고 어찌 되었든 봉건사회를 살아가면서 앞서 언급한 의지를 드러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님에 틀림없으며(조선이란 시대에는 대체로 주자의 학설이 팽배했다), 위에서 따로 인용한 직언을 한 것을 두고도 단순히 임금(정조)과 뜻이 잘 통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일이다. 물론 같은 이유로 시대적 한계와 더불어 다산 개인적인 한계 역시 존재할 것임에도 분명하다. 그는 이미 기득권이라 부를 수 있는 집안 태생이었고 스스로도 상당한 지위의 관료였으며 이런저런 교육 여건 또한 지금으로 보면 '빈익빈 부익부'의 주인공이라 말할 수밖에 없는 까닭이다. 이래저래 여러 가지 의미로 이율배반적이다…….





대밭 속의 부엌살림 중에게 의지하니 (竹裏行廚仗一僧)
가엾은 그 중 수염이며 머리털 날마다 길어지네 (憐渠鬚髮日鬅鬅)
이제 와선 불가 계율 모조리 팽개친 채 (如今盡破頭陀律)
싱싱한 물고기 잡아다가 생선국 끓인다오 (管取鮮魚首自蒸)




여담이라면 여담일까, 재미있는 일화가 하나 있다. 다산이 유배 갔던 강진에서 다산초당으로 거처를 막 옮겼을 때에는 거리가 꽤 먼 마을까지 다니면서 끼니를 해결했는데, 근처 백련사라는 절의 중 한 사람이 초당 곁에 움막을 지어 다산의 식사를 대접했다. 그런데 밥을 짓고 음식을 장만하는 날이 늘어가다 보니 머리도 깎지 않고 수염도 길었으며 불교의 살생 계율을 어기고 생선 요리까지 했다는 이야기다.(p.462) 그 백련사의 중이ㅡ 다산이 낙척한 생활에서 겪은 비태, 그가 가진 문제의식, 사회 비리나 구조 악을 대하는 자세와 공렴(公廉)에의 의지를 알아본 바, 그의 인물됨에 푹 빠져버린 것일는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