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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_롱

『니콜로 마키아벨리, 군주론』 (최장집 한국어판 서문, 후마니타스, 2014)


니콜로 마키아벨리, 군주론 - 10점
니콜로 마키아벨리 지음, 최장집 한국어판 서문, 박상훈 옮김/후마니타스


키아벨리는 정치를 윤리(도덕)와 종교로부터 분리시키는 데 성공했을까(실제로 그것이 분리 가능할까? 아니 반대로 이 둘을 접붙이는 것은 어떤 의미를 갖는가?). 성공 여부는 차치하고라도 이것들을 서로 격리시키는 것에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 슈미트 역시 그의 책(『정치적인 것의 개념』)에서 말한 바 있다. 「선악의 대립이 그대로 간단히 미추 또는 이해의 대립과 동일시되지 않고, 또한 곧바로 그와 같은 대립으로 환원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는다면, 적과 동지의 대립은 더구나 이러한 대립들과 혼동하거나 동일시해서는 안 된다 (...) 적과 동지의 구별은…… 도덕적, 미학적, 경제적 또는 다른 모든 구별을 그것과 동시에 적용하지 않아도 이론적으로나 실천적으로 존립할 수 있다.」 그러나 물론 마키아벨리가 군주에게 도덕 혹은 종교적 제스처를 권장하는 것은 그러한 통념 속에 빠져있는 피통치자들로 하여금 더욱 오랫동안 머물 수 있게끔 만들려는 의도에서 기인한다(그러므로 시각만큼은 철저하게 통치자의 입장에 있다). 실은 『군주론』은 아무것도 아닌 것일 수 있다. 『군주론』의 해석에 이런저런 시도를 가하는 세간의 논쟁이 불쏘시개 역할을 한 것일는지도. 풀이하고, 해석하고, 점수를 매기는ㅡ 평론가, 비평가, 일반인ㅡ 그러나 이러한 '거간꾼'이 없다면 이 지구상에서 비평가의 존재는 물론이거니와 물건을 사고 소비하는 사람 역시 사라질 것이다. 동시에 우리의 삶은 그만큼 재미없고 의미 없는 것이 되어버린다. 애초 마키아벨리의 정치 이론을 내실 있게 소개하려는 이 책의 취지는 소위 '한국어판 서문'을 만들어보겠다는 최장집의 머리말에서 드러난다. 그는 세 가지 주제에 초점을 두고자 했다고 밝혔다. 하나는 국가에 관한 새로운 비전, 그리고 정치적 현실주의, 마지막으로 민주적 공화주의가 그것들이다. 상대적으로 내가 눈여겨보는 것은 정치적 현실주의인데, 하나의 사회는 공공선의 추구나 공적 질서의 창출과 같은 공적 문제를 위한 집합적 결정을 필요로 하게 된다(p.41)ㅡ 이것은 분명 공리주의와도 맞닿아 있을 것이다. 여기에는 대의제 민주주의, 즉 국민들이 대표를 뽑아 자신의 정치적 의사를 대신하게 하는 제도를 어떻게 활용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가 간섭하게 되고, 그렇기 때문에야말로 선출직 대표의 역할이 불가피하게 된다. 다시 말해 우리는 특정 엘리트를 선출해 그 엘리트(라 불리는 자)의 통치에 동의하게 되는 것이다(이 메커니즘은 실은 이렇게도 변용될 수 있다. 우리는 우리보다 나은 엘리트를 대표로 만든 것이 아니라 우리를 위해 대신 정치판에서 싸워 줄 용병을 뽑은 것이므로 언제나 감시, 감독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그러나 어쨌든 민주주의란 것 역시 통치 체제의 하나일 뿐이다). 여기에 붙어야만 하는 단어가 하나 있다. 바로 '참여'다. 최장집은 다음과 같이 기술한다. 「귀족들은 민중에 반해 군주와 동맹하거나 귀족주의적 공화정을 고수하기보다 민중의 정치 참여를 허용하는 것이 그들의 부와 명성을 확대하고 고양하는 데에도 도움이 된다는 점을 이해할 필요가 있었다.」 마키아벨리가 '갈등'의 유익함과 그것의 제도화를 이야기한 것과 함께, 『군주론』이 이율배반적이라는 것을 재차 확인시켜주는 대목이다. 그가 마키아벨리에게서 추론한 관점 중의 하나는 바로 이 갈등을 인간 정치 행위의 본질로 이해했다는 것이며, 정치에서의 선택은 이상주의적인 최선이 허용되지 않으므로 최소주의적 접근 내지는 원리를 따라야 한다는 점이다.(p.52) 그러니까 우리는 최선(이란 것은 존재하지 않으므로)이 아니라 차악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한다ㅡ 뜬금없지만 이것을 다음의 노랫말로 풀면 이렇다: 「투표는 최선을 선택하는 게 아니고 최악을 피하는 거야.」(「Bullets」 UMC) 처음부터 『군주론』이 민중을 대상으로 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최장집이 말하는 20장의 중요성은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군주는 '최선의 요새는 민중으로부터 미움을 사지 않는 것이며', '민중이 당신을 미워한다면 어떠한 요새도 당신을 지켜 주지 못한다'는 점을 군주에게 일깨우고 있기 때문이다.(p.67) 이것은 '민중을 다루는 법'으로 보아도 무방할 것만 같다. 그런가하면 『군주론』을 우리말로 옮긴 박상훈 대표는 또 흥미로운 이야기를 했다. 애초 『군주론』은 메디치 가문에 헌정될 의도를 지니고 있었으나 그렇지 못했으며, 오늘날 우리가 읽고 있는 것은 첨언된 내용을 포함하고 있는데ㅡ 마키아벨리가 『군주론』을 쓴 진정한 이유가 메디치 가문의 통치자들에게 '덫을 놓기'위해서였다는 식의 다소 믿기 어려운 이야기가 따라붙는다고 말이다.(p.101) 이것은 그의 저작이 통치자들에게만 헌정되었다면 모르겠으나 이미 『군주론』이 일반 대중에게 널리 읽히고 있으므로 마키아벨리 자신과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엘리트(위에서 언급한)를 '엿 먹일 수 있는' 기회로 탈바꿈했을는지도 모른다는 의미가 된다. 최장집은 현실주의가 약한 한국 정치에서 우리 모두가 겉으로 좋은 것만 말하고 속으로는 거짓말하는 '숨은 마키아벨리'일지 모른다고 선언했다. 그리고 동시에 그의 다른 책(『노동 없는 민주주의의 인간적 상처들』)에서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시민권'을 주장했다. 스키너(Quentin Skinner) 역시 마키아벨리의 주요 관심사 중 하나가 통치자들에게 무엇보다 가장 기본적인 의무를 상기시키는 것이라 했다. 그러므로 어떻게 보아도 『군주론』이 통치자의 시각에서 쓰였고 그들에게 읽히는 것이 최초의 목적이었다손 치더라도 여기에는 지극히 당연한 명제, 즉 민중과 참여라는 두 개의 근본적인 모탕이 있어야 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으려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귀결인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