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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_롱

『강신주의 맨얼굴의 철학 당당한 인문학』 강신주, 지승호 (시대의창, 2013)


강신주의 맨얼굴의 철학 당당한 인문학 - 8점
강신주.지승호 지음/시대의창


수영을 들고나왔을 때보다 강신주는 이쪽이 좋다. 『김수영을 위하여』도 괜찮았지만 사사건건 김수영에 옭아 드는 느낌이었다. 여기서도 장(章) 하나를 통째로 할애해 그를 끄집어내고는 있지만 차라리 이편이 나은 점은 그만큼 김수영에 구애되는 비중이 적어졌다는 것. 그러므로 조금 더 거시적이 되고 조금 더 '맨얼굴'이 된 셈이다. 궁극적으로 인문/인문학이 당당해지는 것은 환영할 만한 일이고 인문학을 하는 이들이 많아져야 한다. 모이고, 묻고, 답하고, 토론하고, 촉구하는 논의가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인문학은 달큼한 사탕 껍질을 벗어던질 수 있다. 그렇게 되면 인문/인문학이 감당해야 할 용기는 일순 약해졌다가 다시 제힘을 되찾고 건강한 인문학으로 바뀔 수 있다. 그런데 지금을 보면 말발과 글발이 고르지 못한 이들이 인기를 얻는 것만 같다. 고르지 못하다는 건 쉽게 변질된다는 의미다. 그리고 쉽게 변질되면 그것은 더 이상 당당하지 못하게 되고, 사람들은 간지러운 곳을 긁어 주는 것 같은 펜대에 현혹되어서는 제 할 말을 하지 못하고 그저 편승만 하게 된다. 굳이 내가 나서지 않아도 되니까, 저 사람이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다 해주니까. 그렇다면 여전히 사탕 껍질 속에 파묻혀 있는 것이나 매한가지다. 안경을 삐딱하게 쓰고서 내가 밟고 있는 땅이 기울어졌다고 말한다. 스스로 고개를 갸우뚱하게 해서는 누군가가 와서 내 머리를 난타했다고 말한다. 말을 쉬 하지 못하고 언제나 차렷하고만 있으면 언제나 타인에게서 답을 구하게 된다. 묻고 답하는 것은 외따로 있어서는 안 된다ㅡ 그럴 바에야 균형을 버리고 어느 한쪽을 편드는 것이 낫다, 적어도 자신이 피해를 입었다는 자각은 하지 못할 테니. 도덕이 땅에 떨어졌다? 유불리를 따지지 않겠다? 지도자는 항상 옳은 말만을 한다? 누군가를 가리켜 지도자라 한다면 자신은 추종자에 불과해진다. 그리고 그 지도자라는 것은 지배자와 다른 말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희한하게도, 이 모든 논의가 성립하려면 사회과학이 살아나야 할 것이다. 그럴듯한 인문학은 사회과학을 죽여 왔고 번지르르한 말들은 커리큘럼 없는 유행이 되었다. '그럴듯한' 것이 아니라 '응당 그래야 하는' 것들이 판을 쳐야 하지 않겠나. 당당한 인문학이 되자고? 역설적이게도 사회과학을 죽인 허튼 인문학은 죽었다 깨도 당당할 수 없다. 진열장 노릇을 하지 않으려면 사회과학이건 인문학이건 언죽번죽한 치렛말에서 벗어나 맨얼굴을 보여야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