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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_롱

『사람들은 어떻게 광장에 모이는 것일까?』 마이클 S. 최 (후마니타스, 2014)


사람들은 어떻게 광장에 모이는 것일까? - 8점
마이클 S. 최 지음, 허석재 옮김/후마니타스


은 공유 지식(common knowledge)을 매개로 조정 문제(coordination problems)를 다룬다ㅡ 사람들이 이런저런 조정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공유 지식이 필요하다는 관점이다. 내가 알고 있는 메시지를 당신도 똑같이 알고 있고, 내가 그 메시지를 알고 있다는 사실을 당신도 알고 있고, 내가 알고 있는 것을 당신이 안다는 사실을 내가 인지하고 있다(메타지식)는 무한 회귀의 공유 지식 과정을 거쳐 조정 문제에 도달한다는 거다(그러므로 조정에 성공하려면 메타지식이 필수적이다). 여기 하나의 예시가 있다. 나는 시위대에 참가하려고 하는데 공권력에 의해 강제당하지 않을 정도의 많은 사람이 참여할 때에만 함께 행동하려 한다. 그러는 편이 덜 위험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러려면 나뿐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참여할 것이라는 확신이 있어야 하므로 그들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을 나 스스로가 알고 있어야 한다. 다른 사람들은 아무런 생각이 없는데 나 혼자만 결론을 내리고 시위대에 참가했다가 낭패를 보기는 싫기 때문이다ㅡ 권위에 더 많이 복종할수록 나도 복종하려 하고, 그 반대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한마디로 나/당신은 일종의 '추정' 때문에 그렇게 행동한다). 또 다른 사례. 이메일을 사용할 때 참조와 숨은 참조를 사용하는 방법이다.(p.31) 전자에서 수신자는 나와 같은 메시지를 누가 받았는지 알 수 있지만 후자의 경우에는 알지 못한다. 이것은 어딘지 모르게 동창회 모임에 나가려는 주인공을 떠올리게 한다. 「누가 또 오지?」 「X와 Y와 Z.」 「X 때문에 가기 싫지만 Y와 Z가 있으니 가야겠어. 하지만 이런 말을 X에게 하지는 마.」 연인끼리 주고받는 윙크처럼 공개적이지 않은 경우다. 어쨌든 이런 식으로 집단이 특정 메시지를 알고 있고 특정 장소에 모이는 것을 '의례'라 부를 수 있을지 모르겠다. 연설하고 노래하고 사회자를 따라 구호를 외치고 함께 같은 옷을 입는 것은 더욱 명시적이며, 같은 의례가 같은 장소에서 특정 일자에 반복된다면 그것은 시공을 초월해 세대 간에도 이어질 수 있다. 책에서는 동심원 모양의 배치(p.56)를 언급한다. 모두가 원으로 둘러서서 마주 보는 것은 '눈 맞춤'과 같은 기능을 한다는 것이다. 이 내부로 향하는 원은 서로의 얼굴을 확인하며 그들이 같은 것을 보고 있다는 것을 모두가 확인하게끔 만든다(기존의 지배자를 타도하기 위해 사방에서 그를 둘러싼 사람들의 경우에도 매한가지가 아닐까?).





상품으로부터 발생하는 행복은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소비하고자 할 때 커진다. 사람은 대중적인 것으로부터 소외되길 원치 않기 때문이다.


ㅡ p.64 (개리 베커)




광고로 옮겨 가도 성립할 수 있다. 대대적으로 준비된 광고를 꾸준히 본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도 그것을 시청했다는 것을 알게 되고, 사람들의 입길에 오르내리는 것 또한 인지하게 되어 특정 상품을 구매하려 한다면 그것은 조정 문제가 된다(때로는 아예 '광고 내'에 어마어마한 군중의 모습이 삽입되기도 한다). 물론 이러한 텔레비전 광고에는 시청자 중복이나 노출 빈도 등의 매우 복잡한 변수가 간섭하므로 유의미한 결론을 도출하는 것이 쉽지는 않다. 하지만 (미국의 경우) 적어도 텔레비전을 통해 어떤 공유 지식을 산출하는 최고의 기제는 가장 많은 시청자가 보는 인기 프로그램에 해당할 것이다(이를테면 슈퍼볼). 「경험의 공유야말로 텔레비전의 가치다.」ㅡ CBS 사장 하워드 스프링거의 말이다ㅡ 자기 혼자 이상한 브랜드의 맥주를 들고 파티에 가고 싶지는 않을 것이며, 누구나 다른 모든 사람과 함께 같은 종류의 맥주를 마시는 집합적 경험에 동참하고 싶어 한다.(p.83) 그런데 텔레비전과 공유 지식에 관해 한 가지 흥미로운 이야기가 있다. 과거 미국에서 큰 인기를 모은 퀴즈쇼 <Family Feud(가정불화)>에 관한 것이다. 이 프로그램은 두 가족이 출연해 100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 조사에서 최다 응답이 무엇인지를 알아맞히는 포맷이다. 저자가 주목하는 것은 바로 이 프로그램이 사람들로 하여금 다른 사람들이 알고 있는 사실을 아는지 여부에 따라 점수를 주었다는 데 있다(p.80)ㅡ <Family Feud>는 1978년 에미상 시상식에서 최우수 TV 게임쇼 호스트 상을 받기도 했다.



제러미 벤담이 고안한 '원형 감옥' 이야기를 해보자.(p.100) 이 감방은 원형을 이루며 중앙에는 감시탑이 있다. 감독관은 한 지점에서 모든 죄수들을 볼 수 있지만 죄수들은 감시탑의 흐린 유리로 인해 감시자를 볼 수 없으며 또 서로 간에도 시야가 가로막혀 있다. 감방 사이에 놓인 칸막이는 죄수들을 분리해 그들끼리의 의사소통을 막는다. 그러므로 그들은 조정 문제를 해결하기는커녕 집단행동조차 할 수 없다. 만약 감시탑이 개방되어 죄수들이 그 안을 볼 수 있다면 특정 상황이 발생했을 때 그들 사이에는 공유 지식이 형성될 것이기 때문에, 차라리 이런 경우라면 감시자는 원형 감옥과 같은 대칭성을 피해 중앙 집중성이 없는 감옥을 선호할 것이다. 그러나 앞서 말한 감시가 용이한 경우(감시탑이 개방되지 않을 경우)에도 죄수들끼리의 공유 지식은 가능하다. 그들은 각각 떨어져 있지만, 자신이 홀로 감시당하고 있다는 사실과 다른 죄수들 또한 마찬가지로 취급되고 있다는 사실 정도는 알고 있는 까닭이다. 그렇기 때문에 죄수들은 개방되지 않은 흐릿한 감시탑의 유리 때문에 늘 감시당하고 있는 것처럼 행동할 수밖에 없다ㅡ 그들은 감시탑 내부를 볼 수 없으므로 언제 어떻게 감시당하고 있는지를 알 수가 없다(나는 왜 여기서 도처에 널린 CCTV를 떠올리게 되는지!). 추측하건대 개방된 감시탑은 죄수들로 하여금 공유 지식을 형성케 함으로써 동심원 좌석 형태를 가진 원형극장과 다를 바가 없어질 것이다.



과거 국기강하식을 할 때면 모두 가던 길을 멈추고서 국기를 향해 차렷 자세로 서 있었다. 그 시간이 되면 다들 똑같이 행동하리라는 것을 누구나 알고 있었고 또 옆에 같은 자세로 멈춰 있는 사람을 직접 목격할 수도 있었다. 이것은 지배의 입장에서 통치의 일환으로 활용하기에 충분하지 않았을까? 거기에서 애국가를 부르는 것은 하나의 의례이며 개인뿐 아니라 여럿의 군소집단이 여러 군데에서 같은 의례를 행하고 있다는 것을 모두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공유 지식과 의례가 반드시 군중이나 집단이 한곳에 모여 있어야만 가능한 것은 아니다. 이미 텔레비전 광고를 통해 그것이 성립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고, 텔레비전이 인간 생활에서 하나의 결속의 도구로서 기능하기에 충분해졌다는 사실도 인지할 수 있다. 나/당신/그(들)/그녀(들)는 각자의 집에서 텔레비전을 시청하며 다른 사람들도 같은 광고를 보고 있다는 사실을 안다. 신문, 잡지, 책을 읽을 때에도 마찬가지다. 각각의 독자는 다른 독자들도 같은 것을 읽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p.136)ㅡ 이것을 위에서 인용한 개리 베커의 말과 섞어 보면, 베스트셀러로 불리는 책들에 동요해 나 또한 그것을 읽어야만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책을 구입하는 줏대 없는 독자들 또한 양산된다는 답이 나올 수도 있다(위의 '같은 맥주를 마시는 사람들'). 물론 정부가 혁명의 단초를 제거하려 하거나 회사가 노조의 분열을 바랄 경우 이러한 공유 지식은 '이간질'에 의해 깨질 수도 있다. 조정 문제를 둘러싼 문화적 갈등을 통해 의사소통을 방해하고 왜곡된 정보를 흘리는 것이다ㅡ 텔레비전 시청과는 달리 공론장의 부재는 바로 이런 곳에서 문제시된다. 나는 어제저녁 다음과 같은 뉴스를 접했다. 지난 4월 서울 청계광장에서 밤 10시까지 벌어진 야간 시위를 두고 '해가 진 뒤부터 해 뜨기 전까지 벌어진 시위를 금지한다'는 집시법 조항이 적용될 수 있었던 것이, 이 조항에 대해 '자정까지는 야간 시위를 허용해야 한다'는 헌법재판소의 한정 위헌 결정으로 인해 처벌받지 않게 됐다는 것이다. 그에 따라 대법원은 야간 시위와 관련된 헌법재판소의 결정에 의해, 일몰 후부터 24시까지 시위를 주최한 해당 사건은 무죄라는 취지의 판결을 내렸다(이미 유죄 판결을 받은 사람들도 재심을 청구해 구제받을 수 있을 걸로 보았다). 자, 나와 당신은 텔레비전 뉴스를 통해 이 같은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렇게 우리는 한곳에 모여 있지 않은 상태에서 공유 지식을 통해 조정 문제에 다가갈 수 있고, 그 시간에 시청한 사람이 많으면 많을수록, 앞으로 집회에 참여코자 하는 사람이 많으면 많을수록 파급효과는 더욱 눈에 띄게 두드러질 것이다.



이 책의 내용이 특이할 만하다고는 할 수 없을는지 모른다(정말 특이한 것은 뒤쪽의 부록이야말로 외려 내용의 절정을 이루고 있는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한 내 정신상태이다). 그러니까 '완전히 깊이' 들어가지는 못한다는 뜻이다. 저자 스스로도 개인의 삶과 사회적 삶에 내재된 온갖 복잡성을 감안했을 때 이러한 비교적 단순한 구분과 비교에 대해서 우려를 나타냈다. 그러나 조정 문제와 공유 지식에 대해 유의미하게 분석하고 설명한 것에는 나는 동의하고 있으며, 그의 말처럼 공유 지식이라는 개념을 대중화하는 데 기여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메타지식의 무한 회귀에 관한 아주 재미있는 질문 ㅡ 인지(cognition)의 관점에서 바라보면 공유 지식이 우리가 사는 세상의 일부를 이루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는 주장에서 기인한 ㅡ 이 있다. 「아이스크림 파는 차가 어디에 있는지를 메리가 알고 있는지 존은 알까?」(p.116)



덧) 그런가하면 이런 거짓 공유 지식도 있다. 메이저리그 감독이었던 화이티 허조그의 말이다. 「한 사람을 멋들어지게 속여 넘기는 길은, 당신이 생각한 것을 상대가 어떤 식으로 알아냈으면 좋겠는지 하는 것을 당신이 실제로는 생각하고 있지 않다는 걸 그가 알아내리라고 당신이 생각한다는 것을 그가 알아낼 것임을 당신이 알아냈다고 그가 생각하게 만드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