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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_롱

『문화 유전자 전쟁』 칼레 라슨, 애드버스터스 (열린책들, 2014)


문화 유전자 전쟁 - 8점
칼레 라슨 & 애드버스터스 지음, 노승영 옮김/열린책들


학적 진보는 이렇게 일어난단다. <기존 패러다임의 모순 발견 → 새로운 실험 → 정보 공유 → 논문 발표 → 학회 개최 → 새 이론의 등장과 검증 → 새로운 진리 탄생 → 해결책을 마련한 과학자의 노벨상 수상> 이러한 패러다임의 전환은 거의 언제나 정치적 혁명처럼 추잡하고 혼란스럽고 너저분한 과정이며 악의에 찬 폭동처럼 전개된다.(p.271) 칼레 라슨에게 빌어먹을 카트1가 없었다면 아마도 이런저런 실험과 이야깃거리, 흥미로운 각성 촉구의 방법 등은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대학의 경제학과가 돌아가는 꼴이 경찰국가를 빼닮았다며 신고전경제학(neoclassical economics)의 성벽을 무너뜨리고 싶어 한다ㅡ 추측하건대 기존의 경제학자들은 이 『문화 유전자 전쟁』을 과격한 잡지로 볼지도 모른다. ……커피 한 잔을 손에 든 교수가 경제학 수업을 하기 위해 강의실로 들어선다. 그러고는 묻는다. 「이 커피 보이나?」 그는 어리둥절한 학생들을 뒤로하고 내처 말을 잇는다. 「커피는 보이지만, 과테말라 농장도 보이나? 유럽연합 관세는? 커피 노동자들의 급여 명세서는 어디 있지?」







우리 사회는 밥 먹고 나서 숟가락을 씻는 것보다 땅속에서 석유를 뽑아내어 정유 공장에 운반하여 플라스틱으로 변환하고 적절히 성형하여 가게에 운송한 플라스틱 숟가락을 쓰는 것이 더 효율적이라고 생각하는 놀라운 경지에 올랐다.


ㅡ 본문 p.225




화폐는 애초 상품 교환의 용이성에서 출발했지만 돈이 또 다른 돈을 만들어내는(탁월한 이자의 번식력) 현상이 생김으로써 그것은 사회적 유대를 위한 호혜처럼 받아들여져 왔고, 그런 돈을 안심하고 맡기라는 세계 거대 은행들을 우리는 현 상황에서 글로벌 카지노라 부르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ㅡ 이런데도 신고전경제학은 여전히 힘이 세다. 일전에 석유(돈, 전쟁, 암약)에 관한 책을 읽고서 새삼 떠올렸던 것인데, 영화 《매트릭스》의 스미스는 인간에 대한 정의를 이렇게 내린다. 「지구상의 모든 포유류는 본능적으로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데 인간들은 안 그래. 한 지역에서 번식을 하고 모든 자연 자원을 소모해 버리지. 너희의 유일한 생존 방식은 또 다른 장소로 이동하는 거야.」 이 책도 신고전경제학과 그에 대한 맹신을 비꼬며 비슷한 말을 한다. 「다랑어가 씨가 마르면 해파리를 먹고, 해파리가 씨가 마르면 갯지렁이를 먹고, 갯지렁이가 씨가 마르면 불가사리를 먹으면 된다는 식이다. 불가사리가 씨가 마르면 무엇을 먹을까? 아무도 모른다.」(p.90) 발전이란 무엇인가? 책에 의하면 발전의 과정은 이렇다ㅡ ①인간이 자연과 분리되어 목초지는 논밭으로 오솔길은 도로로 바뀐다. ②농업이 전파되고 석탄이 산업 혁명의 연료가 된다. ③물이 귀한 대접을 받고 석유를 얻기 위해 점점 더 깊이 파들어 간다. ④갈등과 불화가 번져 지구와 그 위에 사는 모든 생명체가 대격변의 고통을 겪는다. 마지막 ④의 단계에서는 두 가지 선택이 가능하다. 발전에 대한 지식이 폐기되어 모든 것이 백지에서 새로이 이루어지거나, 때를 놓쳐 붕괴가 일어나거나(책은 후반부에서 붕괴를 맞이한 후의 상황도 그리고 있다).





현대 경제학은 정말로 맛이 가서, 학문 자체를 위한 지적 유희로 전락한 것일까(경제 모델을 계산하는 컴퓨터 모니악(money + mania + computation)의 이름에 'mania'를 조합했다는 것에서부터 조짐이 이상했을지도)? 우리는 석유를 캐내고 물고기를 잡고 숲을 깎아 그것들을 '자본'이라 부르며 판매하는데, 이것은 다시 '소득'이라는 이름으로 바뀌어 불린다. 그런데 참 괴상하다. 집주인이 자신의 집에 있는 가구들을 죄다 꺼내 팔아치우면서도 그것을 버젓이 '자본'과 '소득'이라 부를 수 있는 것일까? 제 살림이 사라지는데도? 어딘가에 몰래 들어가 물건을 훔쳐 오지 않는 이상(물건이 줄지 않는 매직 하우스가 아니까 말이다) 재생산이 가능할 리 만무하므로 자본이니 소득이니 하는 것은 어딘지 좀 이상해 보인다. 하지만 보자. GDP가 올라가는 과정을 유심히 쳐다보면 이 이상한 논리가 이상한 것이 아니게 된다. GDP가 증가하는 경우는 다양하다. ①범죄: 도난 보험금 지급 → 새 제품 구입 → 경비원 고용 → GDP 상승 ②건강 악화: 질병 치료 비용 발생 → GDP 상승 ③가족 해체: 이혼 변호사 비용 발생 → 새로운 주거 마련 → GDP 상승 ④부채, 압류, 파산: 법률 비용 → 이사 비용 → 주택 등 재구매 → GDP 상승 ⑤자원 고갈: 석유 매장량 감소 → 반대로 가스 가격 상승 → GDP 상승 ……어느 날 아침 값비싼 이혼 수속을 밟고 저녁에 집이 화재로 내려앉아 법률 비용이 발생하고 보험금을 받고 가재도구를 새로 샀다면 GDP 관점에서는 최고의 하루일 것이다. 만세!(p.217) 그러니까 GDP(또 GNP)에 있어 삶을 비참하게 만드는 많은 것은 합산되는 반면 삶을 가치 있게 만드는 많은 것은 제외된다. 재미있고 괴상하지 않은가?




경제학은 대체로 보면 자기 충족적 심리학이다. 경제학이 하는 일은 사실상 행동 모형을 구축하는 것이다. 이것은 행동의 모범이 되어 우리가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가를 규정한다.(p.314) 인간은 스스로가 경제동물을 자처했다(animal ambition!). 탈자폐 경제학 운동 ㅡ 자폐 학문이 되어버린 낡은 주류 경제학에서 벗어나자 ㅡ 을 벌이고 있는 질 라보는 말한다. 「우리는 종교를 잃었다. 그래서 삶에 의미를 부여할 다른 무언가를 찾은 것이다.」 신고전경제학은 경제 사상을 뜻한답시고 은근슬쩍 자연 법칙인 척하며 난공불락의 성채를 이루고 있는 듯한데, 새로운 이론적 토양을 원하는 사람들은 그것을 두고서 매끈한 곡선 따위로 점철된 거짓 그림이라고 외치기 시작했다. 또 세계 도처에서 경제학을 배우는 학생들은 주류 경제학과 경제 현실 사이에 분명한 괴리가 있다며 수업을 거부하기도 했다. 위에서 인용된 신고전파 이론에 대한 우려는 어찌 보면 유권자의 생각이 조사에 반영되는 것이 아니라 (비참하게 낮은 응답률을 자랑하지만 아주 조그만 글씨로 적혀 있기 때문에 눈치 채기 힘든) 여론조사 스스로가 유권자들의 향후 행동방향을 조종하려 하는 것과 비슷하다. 이렇듯 현실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는데다가 게임에서 지고도 거액의 보너스를 받는 자들이 계속해서 생기는 현상이 팽배한 지금, 경제학은 시장 경제가 잘 돌아가고 있다며 풍부한 자본을 가진 사람들을 위한 것이 되어버렸다. 이쪽에서는 화폐가 교환의 수단이 되는 목적을 잃고서 자꾸만 이자를 흘레붙이려 하고, 저쪽에서는 경제학이 아름답게 보이는 수요 공급 곡선으로 그것을 뒷받침한다ㅡ 케네스 볼딩 왈, 「기하급수적 성장이 영원히 계속될 수 있다고 믿는 자는 미치광이 아니면 경제학자다.」 ……이런데 아직도 라떼 거품이나 쪽쪽 빨고 있을 텐가?(p.85)



1 그는 어느 날 들른 슈퍼마켓에서 카트를 빼내려면 동전을 넣어야 한다는 사실에 혐오감을 느꼈고, 이것은 자본주의 소비문화에 저항하며 광고 없이 운영되는 잡지 《애드버스터스(Adbusters)》의 발행으로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