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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_롱

『예술 분과로서의 살인』 토머스 드 퀸시 (워크룸프레스, 2014)


예술 분과로서의 살인 - 10점
토머스 드 퀸시 지음, 유나영 옮김/워크룸프레스(Workroom)


명 높은 아편쟁이가(그의 표현대로라면 아편은 '공정하고 교묘한' 물건이다) 살인에 대해서도 스스로를 ㅡ '유해한 구석이 없는' ㅡ 애호가 혹은 감정가라는 수식어로 치장한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특히 19세기 초 런던에서 일어난 연쇄살인범 존 윌리엄스 ㅡ '‘작업 수완이 좋은' ㅡ 사건을 다루며 드 퀸시는 예술적 살인, 살인의 예술성 내지는 미적 감각, 살인을 '작품'이라 명명하고 범인 윌리엄스를 가리켜 예술가라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고 있다. 심지어 윌리엄스가 저지른 두 건의 살인사건 중 첫 번째를 두고는 '예술가의 데뷔작'이라고까지 부르는 등 어처구니없는 발언을 서슴지 않는다. 이 맹랑하고 가증스러운 아편쟁이는 (아마도 '아름답고 작품이라 부를만한') 살인의 원칙으로 3가지를 꼽는다ㅡ 신문 독자 패거리들은 피비린내만 충분하면 아무것이나 다 좋아하지만 양식 있는 이들은 그 이상의 것을 요구하므로 자신이 '살인의 원칙'에 대해 언급하려는 것은 실천이 아닌 판단을 조절하려는 목적이라는 토를 달아놓았다. 먼저 그는 살인범의 목표에 적합한 부류로 명백히 피해자가 선량한 사람이어야 하는 동시에 공인(公人)이어서는 안 되며 건강해야 한다고 썼다. 선량한 피해자라는 것은 결정적인 순간에 그 스스로가 되레 살인을 기도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며, 공인에 대해서는, 이를테면 교황은 사실상 모든 곳에 편재하므로 일종의 추상적 관념, 즉 현실성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이유를 들었다. 또한 병자를 죽이는 것은 야만적인 행동인 까닭에 건강한 대상을 선택하라는 충고도 곁들이고 있다. (나머지 두 가지 원칙에 관해서는 엉거주춤하게 넘어간다) 드 퀸시는 살인사건 후의 상황을 가정한다. '불쌍한 피살자는 고통으로부터 놓여났고, 악한은 쏜살같이 달아났다.' 자, 그렇다면 그는 이미 우리 손에서 벗어나 탈출했고, 윤리는 제 몫을 충분히 취했으니 이제는 취향과 예술이 개입할 차례인 것이다(p.30)ㅡ 드 퀸시에 따르면 살인자는 살인이라는 예술을 위해 큰 위험을 거저 떠맡는 사람이다. 예컨대 나는 지금 전망 좋은 카페에 앉아 막 찻잔을 들어 올리려고 하는 중인데, 난데없이 「불이야― 불이야!」 하는 고함에 놀라 (동시에 일종의 '구경거리'를 기대하고) 다급히 일어섰다. 그런데 곧 소방차가 도착하는 바람에 차를 마시다 말고 일어나야만 했던 내 행동에 대한 '보상'이 조금도 주어지지 않았다. 그러므로 나는 화재를 즐기는 사치를 누리고 거기에 야유를 보낼 자격이 있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순전히 저 악랄한 아편꾼의 논리에 근거한다('사람의 마음이 방심했을 때 취하게 되는 자연 발생적인 경향').



하지만 나는 실제로 이와 비슷한 경험을 여러 차례 겪기도 했다. 내가 무슨 운명에 씐 것인지 고층건물(누가 보아도 떨어진 뒤 살아서 제 발로 일어설 수 없을 것이 자명한 높이의)에서 사람이 자의에서든 타의에서든 뛰어내리는 것을 지척에서 목격한 것이 최소한 두 번 이상이기 때문이다(정말이다). '타의'라고 표현한 것은 이렇다. 내가 거주하고 있는 아파트 동(棟)은 흔히 일컬어지는 복도식 구조인데, 발코니 바깥으로 고개를 내밀면 상하좌우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똑같은 행동을 했을 경우 우리는 서로의 얼굴을 마주볼 수 있게 된다. 바로 여기서 몇 년 전 술을 들이켠 초로의 남자 하나가 발코니 난간에 매달리다 결국에는 버티지 못한 채 아래로 떨어지고 말았다(8층). 이 경우 술이라는 타자에 의한 ㅡ 판단력이 흐려졌기 때문에 발생한 ㅡ 사고라고밖에 말할 수 없으므로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는 의도(자의)는 손쉽게 배제할 수 있는 것이다. 심지어 이달 초 바로 옆 동에서는 드 퀸시가 말한 '멋진 대화재로 번질 가능성이 있는' 사고가 일어났다(순전히 그의 재인용일 뿐이다). 주위로 몰려든 바글바글한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나는 집에서 그 상황을 그저 멀거니 바라보고 있었는데, 주민의 안녕을 비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이다(소방차는 그다지 빨리 오지 않았다). 드 퀸시는 말한다. 「화재가 사유재산에 일어났을 경우, 우리는 이웃의 재난에 대한 연민에 끌려 첫눈에 그 사건을 구경거리로 취급하는 것을 자제한다 (...) 그리고 어떤 경우든, 재난으로 여겨지는 그 사건에 대해 우선 유감의 뜻을 표하고 난 뒤, 우리는 어쩔 수 없이 그리고 주저 없이 그것을 하나의 극적 스펙터클로서 간주하게 된다.」 그는 이것을 '사람의 마음이 방심했을 때 취하게 되는 자연 발생적인 경향'이라는 꾸밈말로 설명한다. 물론 드 퀸시는 뒤에 가서 자신을 제삼자로 꾸며 살인을 옹호하는 것은 아니라며 비난하기도 하지만, 이런 불가해한 인간의 심리적 구조의 결함에 그는 상당히 매료되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이 같은 방식이 과연 대중으로부터 인정받을 수 있을까? 글쎄. 이것은 책의 간기면께 적힌 출판사의 <제안들> 시리즈에 대한 덧붙임과 닿아 있다. 「일군의 작가들이 주머니 속에서 빚은 상상의 책들은 하양 책일 수도, 검정 책일 수도 있습니다. 이 덫들이 우리 시대의 취향인지는 확신하기 어렵습니다.」



덧) 『예술 분과로서의 살인』의 역자는 드 퀸시의 어조를 빌려 (참으로 깜찍한, 정말이지 힘주어 안아주고 싶은!) 소회를 털어놓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