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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_롱

『세계를 읽다: 호주』 일사 샤프 (가지, 2014)


세계를 읽다, 호주 - 10점
일사 샤프 지음, 김은지 옮김/가지


화 《스크》(1996)의 시드니(sidney)는 호주의 수도가 캔버라가 아니라 시드니(sydney)라고 알고 있던 내 정신을 정도 이상으로 흩뜨려놓는 데 한몫했다. 세계에서 가장 먼저 여성에게 투표권을 부여한 나라, 투표가 의무이며 기권하면 벌금을 부과하는 나라, 마디그라 축제, 휴 잭맨과 히스 레저 그리고 카일리 미노그와 줄리언 어샌지가 태어난 나라. 내가 알고 있는 호주는 이런 정도이다. 아, 코알라도 있었네. 책을 읽어 보니 코알라라는 이름은 '마시지 않는 자'라는 뜻의 고대어에서 비롯되었다고 하는데 실제로 코알라는 나뭇잎에서 필요한 수분을 얻기 때문에 물을 거의 마시지 않는단다……. 하여간에 호주는 남반구에 있어 남쪽으로 갈수록 추워져서 12월엔 여름, 7월에는 한겨울이다. 호주 대륙에서 남쪽으로 2천 킬로미터쯤 내려가면 남극인데 오스트레일리아라는 이름도 남쪽을 뜻하는 라틴어 아우스트랄리스(australis)에서 생겨났다고. 시리즈 첫 번째 『세계를 읽다: 터키』에서 맛본 그들의 매력과는 또 다른 뭔가가 있다. 일단 영어를 쓰긴 하지만 그것에서부터 희한한 문제가 생긴다. 과거 원주민들의 땅을 빼앗은 백인들의 문제로 불거진 애버리진(aborigine), '도둑맞은 세대'와 더불어 초기 호주 땅에 건너온 죄수와 이주민들에 의해 호주 영어는 영국과 미국의 그것과는 약간 다르다는 말이다. 특히 줄임말이 재미있다. 우편배달원(postman)을 postie, 바비큐(barbecue)를 barbie, 크리스마스(christmas)를 chrissie로. 학자들이 이런 집착에 가까운 증세를 hypocorism이라 부른다는데 심지어 그들은 이마저도 hypo라고 부른다는군. 대도시에서 대문을 걸어 잠그거나 자동차 문을 잠그기 시작한 지 얼마 안 된 나라, 꽤 최근까지도 은행에서 '미키마우스'라는 이름으로 계좌 설립이 가능했던 나라, 출입국관리사무소에 실수로 여권을 놓고 와도 별도의 확인절차 없이 우편으로 돌려받을 수 있었던 나라. 책에서 시종일관 묘사하고 있는 순진하고 관대하며 누구나 실수를 할 수 있다는 인식으로 가득한 나라, 호주. 한 가지 부러움의 시선으로 보았던 것은 소위 리더라는 것에 대한 반응이다. 민주주의와 평등 정신이 바탕에 깔린 호주 사람들은 '사람 위에 사람 없다'는 생각을 한다고 한다. 그들에게 정치인이란 국민의 의견을 반영하고 국민을 대신해 일을 처리하는 나와 똑같은 평범한 사람이다. 그러므로 정치인이 해야 할 의무를 저버리고 왕이나 지도자처럼 굴기 시작하는 순간 당장 자리에서 물러나야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당연한 이런 사고방식이 호주인들의 '특징'이라고 하니 한국에 빗대어보건대 어느 쪽이 더 타당한 것인지 의문이 갈 지경이다. 그런데 웬걸, 이렇게 실컷 독자로 하여금 달뜬 마음을 갖게 하더니 이제는 문제라고 생각되는 것을 늘어놓는다. 호주를 대표하는 유칼립투스는 불이 쉽게 붙어 집 가까이에는 절대 심어서는 안 되며, 정원이나 집 안에서 심심찮게 발견되는 거미들은 대부분 엄청난 독성이 있는 존재들이란다. 그러고서 덧붙이는 말은 아주 심플하다. 「물렸다면 즉시 해독제를 먹어라.」 거기다 파리마저도 7천여 종이나 있다고 하니, 태어나 죽을 때까지 온갖 종류의 파리를 접해본다 한들 내 이마와 팔뚝을 거쳐 간 파리가 어떤 종인지 구분하기도 힘들다. 그들이 직장생활에 대해 갖는 인식도 흥미롭다. 우리처럼 조직이란 딱딱한 상하관계가 아니다. 호주에서 윗사람 행세를 하려 한다거나 지나치게 격식을 차리는 것은 적대감과 비협조적인 태도를 초래할 수 있다. 비서는 상사의 업무를 도와주는 사람이지 시중을 드는 하인이 아니며 너무 열심히 일하는 티를 내는 것은 자칫 오만해 보이거나 다른 사람의 기분을 상하게 할 수도 있다. 호주라는 나라에 대한 이런저런 이야기를 읽다 보면 책 말미에 재미있는 퀴즈가 기다리고 있다. 그중 하나를 옮겨 보겠다.





Q. 당신이 일하고 있는 호주 회사에서 프랑스어로 된 문서에 문제가 생겨 번역이 필요하다. 당신은 대학에서 프랑스 언어와 문학을 전공했다. 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하는가?


A) 프랑스어를 전공한 사실을 큰 목소리로 명확하게 말한 후 번역을 시작한다.

B) 누군가 당신에게 "프랑스어를 좀 한다고 하지 않았어?" 라고 말한 후 부탁할 때까지 가만히 기다린다.

C) 망설이며 "내가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한번 검토해볼게요." 라고 말한 후에 번역을 시작한다. 일부러 천천히 시간을 끌고, 상사가 뿌듯함을 느끼도록 군데군데 찾기 쉬운 실수를 넣는다.




세 가지 선택 중 C가 가장 호주인다운 행동이다. 호주 사람들은 잘난 체하는 사람들에게 강한 거부감을 느끼므로 이 문제의 핵심은 너무 티 나게 나서지 않는 것이다.(p.255) 내가 가장 멋지다고 느꼈던 것은 한마디로 설명할 수 있는 그들의 태도다. '느긋하게, 대화를 합시다.' 물론 이러한 방식이 달갑지 않을지도 모른다. 동네 가게에서 앞사람과 수다를 떠는 직원 때문에 한참이나 기다려야 할 수도 있고 음식점에서 주문을 했더니 '어머, 죄송합니다. 재료가 지난밤/지난주/지난달에 다 떨어졌어요.'라는 말을 들을 수도 있다. 하지만 보라. 텔레비전 뉴스에서 리포터가 외무부 장관을 앉혀놓고 '잘난 체하는 멍청이'라고 부르는 상황도 실제로 일어난다는 것을. 1989년 호주로 이민을 떠난 저자에 의하면, 매사에 직설적이고 솔직한 호주 사람들은 종종 유치할 정도로 단순하며 처음 본 사람에게도 스스럼없이 말을 걸고 느긋한 태도로 이야기를 즐긴다. 특히 한번 사귄 친구는 영원한 친구로 삼는데 '우정(mateship)'이라는 단어와 의미를 호주 헌법에 추가해야 한다는 의견이 거론되기도 했을 정도라니 부연할 필요가 없을 것 같다. 느끼기에 따라, 특히 다른 문화권인 우리의 눈으로 보기에 따라서는 뜨악할지 모르는 부분도 있긴 하다. 직원이 실수를 하면 책임을 묻거나 질책하지 않고 어지간하면 용서하고 넘어간다는 것은 본받을 만하다. 그로 인해 밝은 직장생활이 가능하니까. 하지만 반대로 무슨 일이든 대충 해도 된다는 나태한 분위기가 조성된다면 어떨까……. 어딜 가나 다 사람 사는 곳이고 생김새 비슷한 자들이 도처에 널렸다고는 하지만 하나하나 뜯어보면 죄다 다른 것투성이다. 어디든지 말이다. 《브로크백 마운틴》의 각본에 참여한 래리 맥머티도 그의 소설에서 말했잖은가. 「어디에 뭐가 있을지 알 수 없다.」 <세계를 읽다> 시리즈 다음 편은 홍세화가 불을 지폈던 프랑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