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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_롱

『허삼관 매혈기』 위화 (푸른숲, 2007, 3판)


허삼관 매혈기 - 8점
위화 지음, 최용만 옮김/푸른숲


강의 징표였던 매혈(賣血)이 생계수단으로 변하고 '자라 대가리' 노릇을 한 허삼관은 아Q의 정신승리를 물려받아 제 피를 쭉쭉 뽑아낸다. 공장에서 일해 번 돈은 땀으로 번 것이고 매혈로 번 돈은 피를 흘려 번 돈이므로 함부로 쓸 수는 없는 일이다, 라는 것이 그의 철칙 아닌 철칙. 그러면서 돼지간볶음 한 접시와 따뜻하게 데운 황주 두 냥이면 되었건만, 불행하게도 피를 팔다 쓰러져 도리어 수혈을 받는 처지에 몰리는가하면 이제는 나이가 들어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어진 늙은이의 피만 남았으니, 이를 피로 흥한 자 피로 망한다 한들 누가 말을 보탤 수 있을까. 결혼하기 위해 피를 팔고, 외도의 대가인 선물을 사기 위해 피를 팔고, 아들놈이 저지른 폭행을 수습하기 위해 피를 팔고, 또 한 번 중병에 걸린 아들을 위해 피를 팔고, 마지막으로 온전히 자신만을 위해 피를 팔고, 그러다 결국엔 죽어 나자빠지는 거지, 뭐……. 아무튼 헌혈(獻血)과 매혈은 분명히 다르고, 매혈에는 목적성이 뚜렷한데다가 거기에는 또한 모종의 손씻이도 필요하다. 그런데 우리의 허삼관은 매혈(賣血)뿐 아니라 매혈(買血)도 한다. 그는 아내 허옥란과 결혼하기 전 그녀에게 음식을 대접하며 팔십삼 전을 쓰고 장인 될 사람에겐 황주 한 병과 담배 한 보루를 내놓게 되는데, 시간이 흘러 세 명의 아들 중 장남이 허삼관의 씨가 아니라는 게 드러나기 때문이다ㅡ 「이런 창녀 같은 년. 그러고도 서방질한 적이 없다고 떠벌려.」 이러니 보라, 허삼관이 어디 제 피만 판 것인가? 남의 피 또한 돈을 지불하고 사들인 것이나 매한가지였던 셈인 것이다. 희한한 것은, 남의 자식을 때려눕혀 치료비를 구하기 위해 피를 판 것도, 또 간염에 걸린 아들을 위해 피를 팔게 된 것도 죄다 '남의 씨'를 위해서였다는 사실이다. 아내 허옥란의 실언 ㅡ '그때 딱 한 번' ㅡ 으로 밝혀진 바로 그 장남 말이다. 육십이 되어 몸은 쇠잔해졌을지언정 꼬장꼬장한 입담만큼은 여전한 허삼관, 삶 전체를 매혈을 통해 들여다볼 수밖에 없었던 허삼관, 아비 된 자의 자존감을 버리고 양심과 가족을 택한 허삼관, 어느 쪽이든 간에 모두 허삼관의 맨 얼굴이며 채플린식 희비극인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