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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_롱

『죽은 자의 제국』 이토 게이카쿠, 엔조 도 (민음사, 2015)

죽은 자의 제국 - 8점
이토 게이카쿠.엔조 도 지음, 김수현 옮김/민음사


작 한 자밤에 불과한 21그램의 영혼과 의식을 좇는 작품이다. 갈바니즘과 생명 창조, 동일인인 괴물 크리처(the creature)와 창조자(the creator), 인간과 인간의 주인에 관한 이야기. 왓슨, 반 헬싱, 프레데릭 버나비, 프라이데이(『로빈슨 크루소』? 『목요일이었던 남자』?), 알렉세이 표도르비치 카라마조프, 헬레나 블라바츠키, 플로렌스 나이팅게일, 윌리엄 버로스, 찰스 다윈, 언캐니 밸리, 로봇 3원칙과 러브크래프트의 냄새까지. 더군다나 실존 인물과 고유명사가 되어버린 자들이 뒤섞여, 기존에 번역된 엔조 도의 『어릿광대의 나비』와 같이 복잡하고 『살아있는 시체의 죽음』처럼 희한하다. 소설은 인간의 의사와 인식이란 것은, 인간에 기생하며 지배하는 균주(菌株)가 만들어낸 환상이지 않을까 하는 물음을 던진다. 무대는 19세기 말, 빅터 프랑켄슈타인이 그랬던 것처럼 움직이는 시체가 양산되는 세계. 화자인 존 왓슨은 첩보원이 되어 '죽은 자의 제국'을 찾아 나선다. (다소 거리끼게 되는 것이 있다면 엔조 도의 이해하기 어려운 서술일 텐데 한차례 그의 작품을 읽은 후라면 이쪽은 차라리 장난에 가까울 정도다. 또한 근과거와 근미래를 다루며 이런저런 요소들로 인해 스팀펑크로 분류되는 모양이긴 하나…… 글쎄) 영혼이 빠져나간 시신에 가짜 영혼을 주입해 좀비처럼 움직이게 만든 것을 여기선 '죽은 자'라 부르는데, 주인공 왓슨이 최초의 죽은 자를 만나기까지의 과정이 특히 눈여겨볼만하다. 반 헬싱 교수의 주선(스카우트)으로 첩보기관 월싱엄의 일원이 되어 아프가니스탄으로 떠나는 왓슨은 '죽은 자들의 왕국'을 건설한 카라마조프라는 자를 만나고, 그로부터 빅터가 창조한 최초의 죽은 자 '더 원'의 생존과 생명 창조의 비밀이 담긴 <빅터의 수기>에 관해 알게 된다. 사실 『죽은 자의 제국』은 왓슨이 더 원을 만나기까지의 엔터테인먼트적 이야기 진행, 그리고 훗날 그가 고민하게 되는 저간의 사정과 놀라운 결말 (더 원의 등장 이전과 이후) 이 두 부분으로 나뉜다. 그러므로 작품의 프롤로그만 남긴 채 요절한 이토 게이가쿠의 '인간은 죽은 뒤에도 살아갈 수 있는가' 하는 명제는 당연히 전반에 걸쳐 이어지지만 왓슨이 품는 인간에 대한 의심은 결국 죽은 자에 의해 촉발된다. 결말만 떼어 보면 이름 없는 크리처가 자신의 창조자(들)를 설득한 셈일 텐데, 이 부분에서 모든 빅터들 ㅡ 메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 ㅡ 의 고민이 폭발하고 마는 거다. 물론 그녀의 작품에선 인간의 오만과 비극이 초점이 되지만 여기선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의 불분명한 증명과 그것에 대한 회의(懷疑)가 주를 이루어 '의심할 수 없는 사실 / 가당찮은 논리'로 양분되어(비트겐슈타인의 '말할 수 있는 것'과 '말할 수 없는 것'의 구분?) 대결한다(그렇다고는 하나 신이 인간의식의 바깥에 있다는 기독교적 관심을 깔아뭉개는 것으로 봐서는 곤란할 듯싶다)ㅡ 인간으로 하여금 의식하게 만드는 균주가 제 숙주(인간)를 죽음에 이르게 할 수는 없지 않은가. 『죽은 자의 제국』은 그 '죽은 자'가 누구를 지칭하는가 하는 당연한 물음을 함께 던지는데, 개인적으로 상당히 잘 쓴 소설이라고는 보지 않지만 (이미 마련된 최초의 플롯을 가지고 집필했다는 점에서 오는 물리적인 어려움은 차치하고라도) 하나의 아이디어를 발전시키는 과정은 꽤 볼만하다ㅡ 엔조 도는 (이토 게이카쿠의 생전 두 작품을 언급하며) 『학살 기관』의 언어에 의한 인간사회 붕괴와 『하모니』에서 그린 인간 의식 자체의 상실에 이어, '죽은 이후의 인간'에 대한 맥락을 받아들이는 것을 목표했다고 말한 바 있다. 때문에 대체로 지난하게 넘어가는 페이지를 정복하고 나면, 이 소설이 철저하게 엔터테인먼트 작품으로 구상되었다는 작가의 말은 일거에 부정될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