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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_롱

『노동여지도』 박점규 (알마, 2015)

노동여지도 - 8점
박점규 지음/알마


순이 아니다. 첫머리의 '재벌여지도'가 아닌 '노동여지도'를 그리려고 애썼다는 가만한 토로 말이다. '노동여지도'를 읽으면서도 동시에 '재벌여지도'와 같이 느껴지는 것은 상반된 두 가지 사실이 전혀 어긋나지 않는 것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으로, 결코 이것은 모순이나 이율배반이 아닌 이음동의어인 거다. 돈보다 사람이 우선이라는 마음, 계약직이 아닌 정규직이라는 그리움, 침묵의 컨베이어 벨트보다는 연대의 노동, 농성 천막이 아닌 활력의 공장. 21세기 대한민국 노동의 풍경이라는 부제는 응당 '정직한 땀의 대가'과 짝을 이루어야 할 것만 같은데도, 은근슬쩍 '쇳물'이라는 단어가 어디선가 날아와 쿡 하고 박힌다. 정글 자본주의가 상생경제로, 승자독식 자본주의가 소비자선택 자본주의로, 기업의 사회적 책임이 기업의 사회 공헌으로, 낙수효과가 소득창출효과로, 재벌이 대기업 집단으로, 그리고 노동자가 근로자로. 실질적인 노동 지도를 만들기도 전에 입말과 글말에서부터 작은 골목골목을 옥죈다. 꼭 일 년 전 출간된 『노동자, 쓰러지다』를 두 번 읽는 기분이다. 그보다 더 전에 있었던 개그 프로그램 꼭지의 '사장님 나빠요'가 유행어가 되었을 무렵, 그때와 별반 달라지지 않은 느낌이다. 50도가 넘는 탱크 속에서의 용접 노동, 머리카락과 휴지 섞인 도시락을 거부하며 '우리는 개밥을 먹을 수 없다'던 도시락 거부 투쟁, 그때가 1986년 무덥던 여름이었고, 분명 지금 21세기 어디쯤에도 존재할 것이다.(p.79) 자국인도 이럴진대 외국인 노동자는 더할는지 모른다. 내 아버지는 택시기사다. 이따금 한국에 와 일하는 까무잡잡한 피부색의 남자들을 승객으로 태울 때가 있는데, 그때마다 어딘지 모르게 안쓰럽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단다. 하지만 내가 그런 '안쓰러운' 외국인 노동자였을 때도 있었다. 육칠 년 전쯤 일본에서 일 년 동안 생활하다가 돌아왔다. 이쪽이야 전공이 일문학인 탓에 겸사겸사 좋은 경험을 했다고 여기고 있으나 그쪽 사람들은 나를 외국인 노동자로 받아들였을 것이다. 물론 지금 한국사회에서, 또 『노동여지도』에서와 같은 '봉 취급'은 아니었을지라도. '사람 장사'를 한다는 끔찍한 단어 조합에서부터 귀신보다 사람, 사람보다 회사가 더 무섭다는 웃을 수 없는 푸념, 하청의 하청의 하청까지 이어지는 끝도 없는 가지치기까지(훗날 노동자가 될 청년들도 무사할 수 없다. 3포(抛)니 5포니 하는 말도 있으나, 나는 책에서 '1년 세대'라는 말을 처음 접했다. 1년 뒤에 뭐가 돼 있을지 모르고 예측이 안 되는 세대를 뜻하는 말이란다). 박점규의 마지막 한숨, '2015년 이 땅의 노동여지도는 전국이 흐리고 비가 내립니다.' 노동 현장엔 숭고한 노동만이 존재해야 할 텐데, 지금도 그곳 한쪽엔 투쟁의 먹구름이 자리하고 있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