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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_롱

『일단, 웃고 나서 혁명』 아지즈 네신 (푸른숲, 2011)

일단, 웃고나서 혁명 - 8점
아지즈 네신 지음, 이난아 옮김/푸른숲


강산도 식후경이고 혁명도 웃고 난 뒤에. 『일단, 웃고 나서 혁명』이 언제 어디서건 유효성을 갖게 된다면 그건 풍자라는 맥락에서 이야기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현재 <민상토론>이라는 공개 코미디 프로그램의 한 꼭지가 인기를 얻고 있는데 이 또한 매한가지. 씁쓸함이 배가되는 건 그 꼭지가 '정치판'을 풍자하는 것이 아니라 '정치판을 마음껏 풍자할 수 없는 사회'를 풍자하고 있는 까닭에서다. 아지즈 네신 본인이 이러한 글로 수감되기도 한 걸 보면 풍자와 웃음의 자유가 갖는 파급과 이중성이 더더욱 부각된다). 수록된 첫 글 <우리는 외메르 영감을 뽑지 않겠다>는 동네 이장 선거를 다룬다. 오랫동안 이장이었던 외메르를 갈아 치우자는 주민들의 결심이 굳은 가운데, 저마다 각자의 이유로 외메르를 만나게 된다. 그들은 모두 소송이다 뭐다 하며 어려움 하나씩을 격고 있고 외메르만이 그 해결책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행여 단합이 깨질까 조심조심 외메르와 접선(!)하려는 주민들의 의지와는 달리 결국 그들은 한날한시 외메르 영감과 얼굴을 마주하게 되고, 절대 외메르를 뽑지 않겠다는 말은 선거 당일 무색해지고 만다. <혁명이, 아무도 모르게>의 모습은 혁명을 꾀하는 자들이 성공한 후 그 사실을 알릴 길이 없어 전전긍긍하는 이야기. 심지어 자신들이 꼭 혁명을 해야 한다는 기치 아래 다른 혁명 단체를 발견한 뒤 그들을 체포하고 나서야 기어이 자신들만의 혁명에 성공한다. 그런가하면 <모든 것은 주지사의 질문에서 시작되었다>는 전화통만 붙잡은 채 서로 일처리를 미루는 공무원들을 꼬집는다. 사실 '웃음의 자유'는 저 유명한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에서도 이야기된다. 거기에서 늙은 수도사 호르헤는 웃음을 싫어한다. 왜? 웃음은 두려움을 없애기 때문이다. 두려움을 없애면 신앙도 없다. 악마에 대한 두려움이 없다면 하나님도 필요 없으니까 말이다.(네이버캐스트, 진회숙) 웃음이 끊기고 헤게모니를 쥔 자에 대한 풍자마저 사라진 세계가 어떨지는 상상하고 싶지도 않지만, 우리 사회가 공포로 가득 차고 황폐해지리라는 것은 자명하다. 외국인에게 잘 보이기 위해 이런저런 가재도구를 집으로 들이는 이야기 <우리 집에 미국인 손님이 온다>에서처럼 쓸데없는 습성으로 점철된 사람들은 비단 소설 속에서만 드러나는 것은 아니며, <지붕 위에 미친놈이 있다>와 같이 끊임없는 권력욕에 사로잡힌 작자들 또한 텍스트 안에만 갇혀있는 것은 아니다. (어쩌면) 이러한 담론은 시간과 장소에 상관없이 우리를 괴롭히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반드시 풍자라는 것이 웃음만을 목표로 해서는 안 된다. 풍자는 풍자 그 자체가 주어가 되어 풍자의 대상이 되는 것을 공격해야만 한다. 때로는 계몽의 성격을 띠면서, 이를테면 (이런 표현은 쓰고 싶지 않으나) 하부(계층)에서 상부(계층)를 공격하는, 그래서 특히 기득권과 그 언저리에서 어슬렁거리는 대상을 깎아내리고 우습게 만들어 조소를 이끌어내야 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야말로 풍자가 만들어내는 웃음은 무언가를 깨부수고 공격함으로써 사회를 밝게 만들기도 한다. A가 B를 공격하고 조롱거리로 만드는데 사회가 밝아진다? 일견 이상하게도 들리지만 적절한 시의성을 지닌 풍자가 잘못된 것(들)을 꼬집는다면 자연스레 수긍이 간다. 왜? 앞에서 언급했듯 웃음은 두려움을 없애기 때문에, 기득권(층)을 조롱해 거기에서 웃음과 해학, 나아가 경종을 울려 사람들로 하여금 무언가를 깨닫게 한다면 더 이상 사람들은 자신들을 짓누르는 상부의 무게에서 벗어나려고 할 게 빤하기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