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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_롱

『에로스의 종말』 한병철 (문학과지성사, 2015)

에로스의 종말 - 8점
한병철 지음, 김태환 옮김/문학과지성사


타유처럼 에로티즘을 가리켜 죽음까지 파고드는 삶이라 단정할 수 있으려나. 그에 따르면 에로티즘은 자연 본래의 목적과는 별개의 심리적 추구이며 그런 까닭에 생식과는 구분된다. 그러나 그가 자신의 책 결론 부분에서 말하길 에로티즘은 우리의 통제권 밖에 있는 문제 중의 문제다. 인간과 에로티즘을 분리할 수 없는 한 인간은 그 자신에게 문제이며, 그리고 에로티즘은 인간의 문제이다(『에로티즘』 민음사, 1997). 『에로스의 종말』에서 한병철이 이야기하는 성과 원리, 에로틱한 갈망, 타자의 부재 속에서야말로 발현되는 쾌락ㅡ이러한 급습은 오늘 우리의 전 영역을 지배한다(그러므로 정반대의 논리도 가능할 것만 같다). 환상의 위기, 타자의 소멸, 에로스의 종말. 만일 욕망이란 것이 언제나 타자에 대한 욕망이라면, 그래서 무언가 가질 수 있는 상상력이 상품, 이미지, 소비와 결부하게 된다면 나는 심지어 (다소 동떨어진 맥락일지라도) 다음과 같은 경우를 떠올려 볼 수도 있다ㅡ어느 책에선가 읽은 바에 의하면ㅡ암컷 송어가 짝짓기를 위한 경쟁을 벌일 때 속임수를 쓴다는 사실을ㅡ예컨대 오르가즘에 도달한 것처럼 행동한다는 건데, 어딘지 모르게 한병철이 적시한 '비밀도 표현도 없이 구경거리로 전시된 벌거벗음'ㅡ포르노적 노골성ㅡ즉 에로스의 적수인 포르노를 보는 것 같기도 하다. 결국 타자와의 성공적인 관계는 일종의 실패로 여겨져야 할까? 에로스는 모든 것의 실패일까? 우리는 이질성이 제고된 타자를 사랑하지 못하고 다만 그것을 소비할 뿐일까?(p.42) 이래서야 마치 모래 속에서 허우적대는 니키 준페이와 다를 바 없을 것이다(아베 고보 『모래의 여자』)ㅡ알랭 바디우가 이 책 서문에 썼듯(그 이전에 랭보가 말했듯) 사랑의 '재발명'이라니, 맙소사. 하나 단순 사무로 전락한 에로스의 위치라는 것에는 일면 동의해야 할는지도 모르겠다. 그의 말대로 신자유주의의 토대가 충동이라면, 각자 고립되어 있는 성과주체들로 이루어진 피로사회에서는 용기도 완전히 불구화되는 까닭에서다. (에로스는 충동과 혼동되어서는 안 되며 그것은 충동 그 자체만이 아니라 용기 또한 관장한다. 에로스의 정치가 만나는 접점이 바로 용기일 텐데 오늘날에는 이러한 용기도 에로스도 사라져버렸다; p.83~84) 자, 다시 처음으로. 『에로스의 종말』을 시작하며 한병철은 타자의 타자성을 인식하지 않은 채 자기 자신만을 확인하려는 경향이, 스스로인 주체를 타자에게로 내던질 수 없게끔 만든다고 적었다(이 책 두 번째 장에 등장하는 '할 수 있을 수 없음'이라는 표현과 이어지고, 그래서인지 희한하게도 전작 『피로사회』를 자연스레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내가 거울 속의 내 얼굴만을 바라봐서는 타자를 향할 일이 (좀처럼) 없을 것이고 그럼에 따라 타자가 사라진다는 사실 역시 눈치챌 수 없을 터다. 수십억이나 되는 머릿수 가운데 내가 나 자신만을 확인하는 데 성공한다손 그것이 나라는 주체를 겨냥하고 있다고, 거기에 유의미한 존재가 있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