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전과 영원』 사사키 아타루 (자음과모음, 2015)

· 책_롱 2016. 1. 10. 11:53

야전과 영원 - 8점
사사키 아타루 지음, 안천 옮김/자음과모음


치도록 난해하고 빌어먹게 꼬부라진 말들. 감상이랄 것도 없이 대강의 요약을 통해 간략히 머릿속을 정리하는 편이 나으리라. 먼저 상상계ㅡ이미지와 애증의 세계ㅡ라는 거울(이라는 하나의 단계)이 있다. 그리고 인판스(in-fans). 말을 모르는 아이, 말이 없는 자. 능동적이기도 수동적이기도 한, 포악한 전제군주. 이 거울로 인한 단절은 (희미하게나마?)자기와 타자의 구별을 가능케 하고 이 시점에 말(파롤)의 차원인 상징계가 개입한다. 그러나 이 말, 즉 명명(命名)은 명명하는 순간 이루어지는 사물의 살해를 가져오는데, 그것은 주체를 누락시키고 결여되게 만든다. 더군다나 소쉬르가 제시한 시니피앙과 시니피에는 라캉에 와서 전복되기까지 한다. 시니피에는 시니피앙의 효과에 불과하며 이해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는 거다ㅡ시니피앙은 주체를 표상하고 시니피에는 주체다, 시니피앙의 연쇄 끝에 시니피에는 사라진다. 그리고 (다시금 그 순간에만)주체가 출현하게 된다. 라캉은 「자신의 소멸을 동반하지 않는 주체는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진정한 시니피앙이란 그 자체로는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는 시니피앙이다.」라고 말했다. 라캉에게 있어 잘게 찢어도 변하지 않는 것은 시니피에가 아니라 시니피앙이므로. 그런데, 그리고, 그 주체는 대타자의 욕망을 욕망한다. 더욱이 그 대타자에서는 어떤 시니피앙도 얻어낼 수 없다. 「대타자에게는 대타자가 없다.」 「대타자 안에는 '나는 있다'에 답할 수 있는 그 어떤 시니피앙도 없다.」ㅡ정신 건강에 유익할 것 같지도 않은 난해함들! 어쨌든 (기계적으로 조립된)거울의 편에 있는 것은 허상이며 표상인데, 라캉에 의하면 이러한 (정신분석에 있어)표상은 '텅 빈 신체, 유령, 세계와의 관계의 창백한 몽마(夢魔), 야윈 향락'이다. 그렇기 때문에야말로, 내가 거기에 없으므로, (사사키의 표현대로)'거기에 없음' 때문에 주체로 하여금 존재자의 지각을 가능하게 하는 것, 그것이 바로 거울이다.





말하자면 '거울'이란 하나의 장치인 것이다. 그 자체는 말도 이미지도 아니지만 말과 이미지와 물질로, 무엇보다 말과 이미지의 상호 침투로 정치하게 조립된 하나의 장치인 것이다. 그리고 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은 '내가 아니다.' 그것은 표상이다.


―본문 p.122




그리고 내처 실재계가 등장한다. 실재계란 무엇인가? '실재계란 무엇인가?'와 같은 질문을 용납하지 않는 그 무엇, '거울'에 비치지 않는 구멍, 말할 수도 그릴 수도 없는 구멍, 그것이 실재계다.(p.134) 그런데 이 실재계에는 '향락'이 있다. 실재계와 상상계 사이에는 '대타자의 향락'이, 실재계와 상징계 사이에는 '팔루스(phallique)의 향락'이. 프로이트의 쾌락 원칙이 욕망이 사라진 긴장의 해방, 맥 빠짐이라면 라캉의 향락은 쾌락 원칙의 건너에 있다. 긴장을 다시 만들어내 이를 지속시키려 하는 것. 그리고 이어지는 사사키의 확정적인 부연. 「'계속 욕망하는 것, 욕망하기를 멈추지 않는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욕망하는 긴장의 지속을 멈추지 못하는 것'이 향락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리라.」ㅡ쾌락이 '어디인가에 도움이 되는' 것임에 비해 향락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유효성의 내부에 없는' '이용할 수 없는' '맹목적인' 것.(p.140) 자, 팔루스가 향락과 관계하고 있다면 그것은 실재계와 연결되어 있다. 그리고 구체적 성행위에서의 향락, 여기에서 팔루스는 (시니피에를 갖지 않는)시니피앙이며 상징계에 속하는 동시에 거세의 결과로 드러난 것이다. 거세, 거기엔 어떤 향락의 기회도 없다. 팔루스에 의한 향락, 그것은 성행위의 장애가 되어 성교를 성립하지 않게 한다. 즉, '성관계는 없다(il n'y a pas de rapport sexuel).' 팔루스 때문에. (아, 또 있다. 상상계, 상징계, 실재계 모두에 끼어있는 '대상 a.' 주체의 여분, 부스러기, 떨어져나간 것, 찌꺼기. 침, 땀, 피, 배설물, 심지어 낳은(낳아진) 아이마저도) 그런데 젠장, 이런 식의(변죽을 울리는?) 난해함, 희미한 인상과 생경함을 주는 것은 계속해서 이어진다. 이번엔 '죽음'이다. 사사키는 블랑쇼를 데려온다. 「나는 나 자신으로서 죽는 것일까? 혹, 나는 항상 타자로서 죽는 것이 아닐까? 따라서 바르게 말하려면 나는 죽지 않는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 나는 죽을 수 있을까? 나는 죽을 능력을 갖고 있을까?」 다시 말해 죽는 순간 '죽음이 사라진다'는 거다. 그 순간 죽는 누군가 자체가 사라진다. 제 죽음을 마지막까지 지켜볼 수 없는 누군가가. 고로 죽음의 결과라는 것은 결과라 부를 수 없으며 그 죽음을 제대로 마무리할 수도 없다. 자신의 시체를 바라보며 죽음(의 행위)의 완료를 확인할 수는 없는 노릇이므로. 즉 죽음이란 '이 나와 죽음이 통째로 사라져가는 사태인 것이다.' 더불어 우리는 애초 '향락하는 시체를 본뜬 모양'이고 인형이며 표상으로 살아가고 표상으로 묻힌다. 표상으로 살아가는 삶, 이것이 사람의 인생이다.(p.241)



르장드르(사사키에 의하면 라캉은 '의심의 여지없이 난해'하고 르장드르에겐 '기묘한 소화하기 힘듦(난해한 것이 아니라 험난한)'이 있다)는 또 어떤가. 라캉을 지나 그에 다다르면 다시금 '거울'이 등장한다. '이것은 너다(동일화) / 이것은 네가 아니다(표상에 불과)'를 동시에 보여주는 거울. 여기서 거울은 거울이 아닌 하나의 장치이며 거울 그 자체는 보이지 않는다. 이 거울을 르장드르는 도그마라 부르고ㅡ표상의 몽타주라는 도그마적 세계ㅡ거울이란 '몽타주의 효과(=사회적 거울)'ㅡ거기서 만들어지는 인간은 신체, 이미지, 말로 구성된, 몽타주ㅡ이 말과 이미지와 향락이 교차하는 거울이, 즉 도그마가 개별적으로 구체화된 것을 그는 '엠블럼'이라 총칭하고 있다ㅡ「향락에 삽화를 그려 넣기. 거기에 엠블럼이 있다.」 사사키는 풋볼 팀의 서포터를 사례로 든다. 그들이 애착하는 것은 이적할 수도 있는 선수 개개인보다도 팀이라는 추상적인 단체라는 것. 심지어 그들은 육체적으로도 그것을 사랑할 수가 있다. 유니폼을 입고, 거기에 비친 자신의 이미지를 보면서 말이다. 그러므로 엠블럼은 거울인 것이며 우리 또한 거울에 의해 표상으로 제조된 것인 이상 엠블럼이다. (이는 굉장히 우스운데, 내가 나임을 입증하려면 내 존재보다 우선시되는 종이 쪼가리 같은 뭔가가 필요하다. 더 우스꽝스러운 것은, 그것은 내가 알지도 못하는 제3자가 보증한다는 것이다. 그럼 그 제3자는 누가 보증해줄 수 있는가?)



사사키는 르장드르로 들어가면서 그의 문장에 자주 출몰하는 '근거율=이성 원리(principe de Raison)'를 먼저 들여다보는데, 하이데거가 말했던 것처럼 근거율은 '어떠한 것도 근거=이유 없이는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 말에는 '근거'가 없질 않나. 사사키에 의하면 근거를 요구하는 것은 '왜'라고 묻는 것이다. 「고로 근거율은 '그 무엇도 왜 없이는 없다'라고 풀어 써야 한다.」(p.294)ㅡ물론 이 말 또한 근거는 없다ㅡ근거율과 인과율에는 근거가 없다(사사키는 말한다. 근거율은 예술이고 근거는 미적, 감성적으로 제시할 수 있을 뿐이라고. 이는 사실인가?). 그것들은 각각의 항이 분할돼 카테고리로서 독립해 있음을 전제로 성립한단다. 그래서 등장하는 것이 '분할 원리'다. 거울과 마주볼 때 분할된다는 것. 하나의 전체상으로서 스스로를 '하나'라고 셀 수 있게 되는 것. 자신을 '하나'라고 부를 수 있다는 것은 자기가 특정한 종에, 인간이라는 종에 속해 있음을 이미 알고 있다는 것ㅡ따라서 거울로 주체를 성립시킨다는 건 그것을 분할해 '하나'로 셀 수 있게 한다는 거다. 반복하자면 인간이라는 종의, 어느 단체에 속하는, 어느 계보에 속하는, 어느 성별을 지닌 인간 중 하나에 불과하다고ㅡ이로써 자신이 하나의 '항'이 될 수 있고 본인이 속하는 '항'과 본인이 속하지 않는 '항'의 분리가 발생한다.(p.304) (사사키는 단언한다. 거울이 필요한 이유, 그것이 근거율과 관계하는 이유는, 우리가 아이로 태어나 아이를 낳아야 하기 때문이라고. 단순히 생식(이는 더 접근하기 어려울는지도 모른다)의 차원이 아닌 계보 원리, 모권, 부권, 재생산=번식)



이 성적 향락, 상징적 팔루스의 향락, 계보 원리, 절대적 성, '아버지란 무엇인가'에 관한 문제를 후다닥 훑고 나면 '세속화를 상대화한다'라고 이름 붙은 장(章)에 들어서게 된다. 시작은 (도그마 인류학에서의)의례에 관하여. 그것은 거울과 주체의 관계다. 고로 의례는 근거율을 낳는 것이며 신체를 직접적인 대상으로 한 봉합과 재봉합이다.(p.359) 유아의 언어 습득에 있어 언어에 대한 믿음은 '반복의 의례'로 달성되는데, 이 반복의 의례가 바로 '조련'인 것. 그런데 희한하다. 여기에 「공장 노예는 규칙적인 시간표대로 상사의 말에 따라 춤추도록 조련되고 강요받고 그 복종의 대가로 소소한 임금을 얻는다 (...) 즉 신체 조련으로서의 정치 조작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도저히 피할 수 없는 사태이다.」라는 말이 묘하게 들러붙는 것은. 더욱이 사사키는 이를 일거에 반복한다. 우리는 거울 아래에, 근거율 아래에, 인과율 아래에, 즉 의례 아래에 있다고. 계보 원리를 짊어지기 위해 아이로 태어나 아이를 낳기 위해서 말이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ㅡ그 텍스트의ㅡ의례성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데에 있다. (저 옛날 로마법과 신학에 의해 단련된 제도적 원리, 제도적 골격 이래)무한히 고쳐진 텍스트는 자료, 도큐먼트, 정보가 되었는데ㅡ따라서 우리는 텍스트의 엠블럼적인 지위를 망각하게 된다ㅡ해석자들은 텍스트의 문서화, 효율화에 걸맞은 거울의 픽션을 만들어 가고 그것은 '살아있는 문서'로서의 교황과 교황청ㅡ그리고 이 살아있는 문서는 훗날 '국가'로 변모ㅡ이는 '법치국가'의 기원이다.(p.371) 사사키를 그대로 따라가면 세속화 이전의 중세 유럽에서 근대국가에 해당하는 정치조직은 살아있는 문서인 교황을 '아버지'로 여기는 교회이고, 세속화 과정은 소위 '정교 분리'의 과정인 것이며, 정치적 사회였던 교회=교황청이 오늘날 일반적 의미에서의 종교 단체로 이전되는 과정ㅡ그리하여 근대국가의 제반 제도는 그것은 대체하면서 성립된 것ㅡ즉 종교 쇠퇴, 국가 탄생이다(그러나 사태는 조금도 변하지 않는다). 그에게 국가는 살아있는 문서인 교황의 후계자로서, 거울로서의 근거율 자체여야만 한다. 그런데 이건 또 뭔가?





(하지만 르장드르에게)국가는 이미지를 조종하고 '아버지'를 상연해 계보 원리를 짊어지는 이상 여전히 종교적 본질을 갖고 있다. 그렇다면 결과적으로 이런 말이 된다. 국가는 토템과 마찬가지로 야만적이고 원시적이다. 달리 말해 그 야만성이, 계보 원리가 국가의 원동력이 된다.


―본문 p.383




어쨌든 르장드르의 결론(이라고 하면 필시 미안한 일이 생길지도 모르나)은 관료제, 봉건제, 법, 의례, 종교는 끝나지 않는다는 거다ㅡ우리가 야만을 벗어나는 일은 없는 것이고ㅡ근대화는 만능이 아닌 것이다. 주체, 국가, 주권, 권력, 의례적 관계/관계들. (줄기차게 이어지는 그 빌어먹을 감옥과 함께 역시나 빌어먹을)푸코에 이르면 규율이란 것은 의례가 아니며ㅡ규율 권력 아래에 권력은 도처에 있고 감시로부터 자유로운 권력자는 존재하지 않는데다가, 감시하는 자 또한 감시받는다. 규율은 의례가 아니지만 법도 아니라는 것. 규율은 반(反) 법률에 가까울 따름이고 사법 권력이 미치지 않는 상대적 독립성을 띤다ㅡ학교, 군대, 병원, 회사ㅡ모든 것을 평가해 보상과 벌이 필요해지며 이러한 평가는 규율 권력이 작동하는 폐쇄 공간 속 개개인을 순위로 구분ㅡ그럼으로써 전원은 서로를 닮아가게 된다ㅡ이것이 규율 권력의 동일화, 동질화, 균질화 기술이다. 「사법이 상시적으로 개인마다 점수를 매겨 단계별로 분류하고, 이를 통해 사람들을 동질화하려고 할까? (...) 따라서 여기에 있는 것은 법률이 아니다. 규율 권력의 세칙은 법이 아니다. 푸코는 이를 '규격'이라고 부른다. 법의 보편적인 규범에 따라 법적 주체를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특정 규격 주위에 개개인을 분포하게 한다.」(p.512) 그리고 보라. 홉스의 '자연 상태'를 난도질하는 푸코를. 그에 의하면 홉스에게 전쟁이 없는 것ㅡ전쟁을 삭제한 것=실재하는 주권이 정복에 의해 성립했다는 사실의 삭제이며ㅡ이는 사회가 전쟁 상태에 있다는 사실을 사회계약이라는 신화로 은폐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 여기까지 오니 대체 그 젠장맞을 주체라는 것의 수상쩍은 정체가 더욱 뭐가 뭔지 모르게 되어버린다. (차라리 푸코보다는 라캉이, 라캉보다는 르장드르가 더욱 더 명징하고 적확하다고 느낄 법도 하고. 왠지 모르게 적어도 나는 일순 그리 느낀 순간이 있었다. 자아의 최적화와 복종, 자유와 착취는 하나가 된다, 자기 착취라는 형식으로 자유와 착취를 결합시키는 이러한 권력 기술은 푸코의 시야 너머에 있다, 고 했던 한병철의 말도 떠오르고 말이다) 사사키가 애초 언급했듯 이 두꺼운 책은 '영원'한 '밤'의 '투쟁'에 바칠 만한 것인가? 이 우연의 중심에 있는 도박 같은 쓰기가? 이 텍스트와 몽타주들이 유령처럼 떠다니는 마당에. 그러므로 지금에 와선, 그의 이 말만 또렷이 기억난다. 「(르장드르가 말하는 바는 다음과 같다)다소 거칠게 말하자면 후마니타스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후마니타스이면서 안트로포스일 수는 있다. 안트로포스만일 수는 있다. 그러나 후마니타스만일 수는 없다. 더 분명하게 말하자. 후마니타스란 안트로포스의 특수한 한 판본에 불과하다.」(p.425)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posted by 아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