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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_롱

『창백한 잠』 가노 료이치 (황금가지, 2016)

창백한 잠 - 8점
가노 료이치 지음, 엄정윤 옮김/황금가지


잔하고 소박하달까. 말미에서 드러난 반전의 주인공은 그 자리에 없는 누군가를 가리켜 묘사한다. 혼자서는 나쁜 짓을 할 용기가 없어서 누군가를 끌어들이고 싶고, 나쁜 짓을 하기 전에 미리 누군가의 허가를 받아 두고 싶은 그런 사람이라고. 나쁜 짓을 하는 자신을 막아 줬으면 하고 자기도 모르게 바라고 있었을지도 모른다고. 깨끗한 거리에 주저하다가 어느 한곳에 버려진 자그마한 쓰레기를 보곤 제 손에 들린 것도 버리고 싶어진다. 그러면 다음 사람도 같은 곳에 오물을 버리고, 또 다른 누군가도 자꾸만 거기에다가 쓰레기를 투척하게 된다는 이야기일는지. 『창백한 잠』은 사진집을 준비 중인 카메라맨 다쓰미 쇼이치의 시선으로 시작한다. 폐허 같은 마을의, 역시 폐허가 되어버린 호텔을 중심으로 허허로운 사진을 찍던 그에게 어떤 여성이 나타난다. 아니, 가만가만 누운, 죽은 상태의 여자 하나가 다쓰미의 앵글에 들어온다. 그가 서 있던 마을의 공항 건설 계획을 반대하는 모임에서 활동하고 있던 저널리스트 아이자와 다에코. 그리고 다쓰미의 신고로 경찰과 함께 달려온 지역 신문기자 안비루 고로의 등장과 함께 본격적으로 이야기가 진행된다. 불타기 전의 호텔, 그 앞에서 찍은 의문의 사진과 사진에 찍힌 의문의 남녀 넷, 사라진 자와 쫓기는 자 그리고 기억을 잃어버린 남자, 작은 어촌의 새벽녘 푸른 실루엣, 그 창백한 무늬를 배경으로 일주일 남짓 동안 벌어지는 사건들……. 책을 덮은 후엔 다소 허탈한 감도 든 것이 사실이다. 이는 부인할 수 없고, 소설의 치명적인 약점이라고까지 할 수 있을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내 개인적인 취향, 나와 비슷한 취향을 가진 독자라면 그러구러 소소한 흥미를 가지고 충분히 읽을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든다. 하드보일드한 맛이라거나 피 튀기는 액션, 꼬리를 무는 복잡한 추리의 과정 등은 다른 작품들에 비해 부족하나, 어지럽게 스케일만 크고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수많은 인물들의 등장과 퇴장으로 이름을 외우는 것조차 버거운 쪽보다는 낫다. 그리 대수롭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풍경과 비교적 작은 무대는 이야기에의 몰입을 배가되게 하고, 카메라맨 다쓰미의 추리 과정은 맥 빠지게 쉬이 느껴지다가도 어느새 진실을 향해 다가서 있다. 거듭 생각해도 다이내믹한 맛은 덜하지만 차분한 느낌의 소설이다. 잠들어 있던 진실이 깨어났다가 일순 모든 것을 껴안은 채 다시 깊은 잠 속으로 빠져드는 이야기(물론 이래서야 참 속 편한 결말이라고 여길는지도 모르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