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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_롱

『성 앙투안느의 유혹』 귀스타브 플로베르 (열린책들, 2010)


'작품 해설'에서 언급하고 있는 ㅡ 작가의 친구인 막심 뒤 캉은 『성 앙투안느의 유혹』에 대한 회고에서, '그가 어디에 이르려는지 짐작할 수 없었고, 실제로 그는 어디에도 이르지 않았다 (...) 확장의 방식을 취했기 때문에 하나의 주제가 다른 주제에 흡수되며 이렇게 계속되기에 출발점을 잊게 된 거야' 라고 적고 있다. 부인할 수 없는 말이다. 『성 앙투안느의 유혹』을 읽고 난 후의 내 감정은,
'너무 많은 것을 담고 있거나, 너무 많은 것을 담으려 했다'는 것이다. 작가는 (혹평때문이었을까, 스스로를 못 이긴 것일까) 초판(1849)을 집필하고도 후에 두 번이나 개작했다고 하는데 ㅡ 그런데 ㅡ 어째서 국내 번역으로 이 초판을 택했을까. 대체 무슨 이유에서였을까(이 의문은 나중에 풀린다). '유혹'은 처음부터 시작된다. 아니 유혹으로 시작해서 유혹으로 끝난다. 작품 마지막에서, 수도승 앙투안느를 유혹하는 악마의 「나는 다시 올 거야……. 나는 다시 올 거야……. 하! 하! 하!」라는 대사로 끝을 맺고 있는 것과, 여기에 등장하는 7가지 중대죄들인 질투, 인색, 음욕, 분노, 식탐, 나태, 교만과 더불어 작가가 창안한 '논리'라는 유혹의 매개가 그 이름에 걸맞게 논리적으로 앙투안느를 설득한다 ㅡ 이 설득은 앙투안느가 스스로를 설득하며 유혹에 휘말리고 싶은 자가당착과 아이러니, 역설로 반증된다. 시종일관 계속되는 유혹의 블랙홀과 카오스, 다양한 동물 등(종류와 수가 너무 많아 이렇게 대신한다)으로 현현되는 유혹의 관념들, 신들의 아름다움과 두려움으로 승화된 거대한 박물관과도 같은 손짓들, 여기서 달콤한 말로 현혹하면 저기서 내처 알을 스는 판타지들. 이러한 묘사와 사유들은, 흡사 사람을 헤집는 도구가 즐비한 시체 해부실이나 군대 사열을 위해 깔끔하게 매만진 빼곡한 공터를 연상케 한다.




아! 심심해! 심심해!
무언가 하고 싶은데 뭘 해야 할지 모르겠어. 어딘가 가고 싶은데, 그곳이 어딘지 모르겠어. 난 내가 원하는 게 뭔지 몰라. 뭘 생각하는지도 모르겠어 (...) 묵주나 굴리는 내가 더 한심하고 바보 아냐? (...) 손에 집어 산산조각 낼 것이 내겐 영영 없단 말인가? 이 모든 걸 너무 오래 참아 왔어……. 그러니 나가! 그러니 나가! 머리카락들아, 내 머리 타래에서 풀려 날아가 버려! 살가죽도 함께 벗겨져 버려! 그 다음엔 머리, 그리고 심장도 떨어져 나가 버려!

ㅡ 본문 p.324~327



그런데 과연 「내 몸은 모든 물질의 질료로 되어 있고, 내 정신은 모든 정신의 본질이 되고, 내 영혼은 전체의 영혼이야! (...) 내가 그 모든 것들이야! 나는 내가 실체임을 느껴! 나는 사유야!」 하는 앙투안느의 말은 그가 악마의 유혹을 물리쳤다고 봐야 할까, 아니면 그 유혹에 굴복했다고 봐야 할까(유신론이나 범신론을 들먹이면 너무 글이 길어지니 그것들을 언급하지 않는다. 그리고 나 자신도 별로 관심이 없다). 어쨌든 앙투안느는 하룻밤 동안 영겁을 경험한다. 그래서 또 한편으론 아라비안 나이트이다. 영성적 매춘이나 교태스런 성자라는 말은 그 단어로서 성립될까? 『성 앙투안느의 유혹』에, 애매모호하게 써놓고 짐짓 심오하게 받아들여지기를 바라는 치기 어림을 느끼면서도 총체적 판타지(!)와 무의식의 내면과 모험 그리고 일종의 시학을 느끼는 것은 잘못되거나 부끄러운 일일까? 어쩌면 수도자를 유혹하는 '논리'라는 유혹자의 「인간은 깨달음을 얻기까지 불확실성 속에 살아야 하고, 빛을 더 갈망해야 하고, 훗날 그것을 얻게 되었을 때 더욱 감미롭게 맛보기 위해 어둠 속에서 표류할 수밖에 없어.」란 대사 하나로 이 모든 대장정이 끝나는 것은 아닐까? 마뜩찮은 자신에의 신념과 잦바듬한 신들의 모습으로 괴로워하는 앙투안느(작가 플로베르)는 무엇을 말하려 하는 걸까. 그루초 막스(julius henry "groucho" marx)의 안경이나 조로 마스크를 쓰고서 자신을 감추는 것은 선과 악 모두에 해당되는 것일까. 아니면 이 모든 것들이 그럴듯한 삼단논법에 불과한 것일까. 나는 잘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