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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_롱

『그리고 죽음』 짐 크레이스 (열린책들, 2009)


목을 보자. 니콜라스 네그로폰테의 『디지털이다(Being Digital)』, 영화 《존 말코비치 되기(Being John Malkovich)》 그리고 짐 크레이스의 『그리고 죽음(Being Dead)』. 모두 ‘being’이 들어있으니 이것은 네그로폰테의 저서처럼 ‘죽음이다’라고 옮길(받아들일) 수도 있다. 그럼 ‘그리고’ 앞에는 뭐가 있을까. (아마도)삶이겠지. 그럼 ‘그리고 죽음’이 아니라 ‘죽음 그리고’라고 해도 무방하지 않을까. 어차피 죽음 뒤엔 삶이고, 삶 뒤엔 죽음이니까 ㅡ 이런 식으로 하다 보면 ‘그리고 죽음’은 ‘죽음이다’, ‘삶이다’, ‘그리고 삶’ 또는 ‘그러나 삶’으로 바꿀 수 있다(말장난이 아니다). 드넓은 바다 전체를 소리로 바꾸어 버리는 해저 동굴처럼 노래할 수 있는 남자와, 가는 허리와 완벽한 18세기풍의 등을 소유한 여자, 대담하고 불안정한 딸, 그리고 죽음. 죽음 때문에 그들은 딱정벌레의 햇빛을 망쳤고 게들이 먹을 수 있을 만큼의 신선함을 잃어 버렸다.


불교 신자인 그레이엄 콜먼(Graham Coleman)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우리는 모두 기쁜 마음으로 휴가를 준비하지만, 확실히 다가올 죽음에 대비하고자 하는 사람은 드물다.」 그런데 내가 의심하는 것 한 가지, ‘확실히 다가올 죽음’이란 건 대체 그 정체가 뭔가? 뭐가 확실하다는 거지? 죽음은 근본적으로, 모순 덩어리로 똘똘 뭉쳐 있다. 예컨대 자유와 자기 상실, 욕망과 거부, 실재와 부재 같은 것들로 말이다. 그래서 『그리고 죽음』은 하이데거처럼 읽기 어렵다. 그가 말한 ‘존재의 목동’을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얼마나 많은 시간을 버려야 했던가. 하지만 그로 인해 존재와 무(無), 영구적 상태의 불안을 알게 된 점은 기뻐할 일이다. 이것은 ‘몬다지의 물고기’로 환원되거나 할 수 있으므로. (바슐라르가 말한)’죽은 물’처럼 물은 아름다운 충실한 죽음의 물질, 그래서 물의 거울이 흐려지는 것이고, 추억이 몽롱해지는 그 죽은 물이 된다. 그 물은 조지프와 셀리스를 어루만지는 바리톤 만의 물이며, 그래서 다시 한 번 ‘그리고 죽음’이다. 셀리스의 발목에 닿아 있는 조지프의 손가락을 보고 「우리 아버지의 손을 치우지 마세요.」라고 실비는 말한다. 이것은 ‘죽음 속에 있는 삶을 데려가지 마세요.’를 의미하며 ‘삶 속에 있는 죽음을 그저 가만히 놔두세요.’라는 뜻이다. 그래서 『그리고 죽음』은 오롯이 이 문장 하나로 축약된다. 「우리 아버지의 손을 치우지 마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