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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_롱

『느림』 밀란 쿤데라 (민음사, 2012, 2판)


란하다, 상당히. 젠장. 대관절 뭘 말하고 싶은 거지. 나는 절망한다. ‘이 느림을 느리게’ 읽지 않으면 얼간이가 되겠는 걸, 하면서 말이지. 책이 명쾌하지 않으니 나도 명쾌하게 쓸 수는 없지만, 그래도 어렴풋이 느껴지는 건, 음, 이건 ‘성이 호텔로’ 변신한 이야기로구나, 하는 것. 하나의 연극이 펼쳐지는 마룻바닥 위구나. 그리고 사랑 또한 변해버린 이야기. 아니, 사랑과 인간은 그대론가? 「시간이란 무엇인가? 아무도 내게 묻는 자가 없을 때는 아는 것 같다가도 막상 묻는 자가 있어서 그에게 설명하려 하면 나는 알 수가 없다.」아우구스티누스의 말인 게지. 시간이란 놈은 좀처럼 알 수 없는 것이므로 T 부인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느림과 한가로움 역시 나로서는 잘 입증이 되질 않는다. 느리게 행동하는 사람들. (어떤 의미에서든)쾌락을 좇는 사람들. 그럼 라캉의 말이 맞는 건가? 「성관계란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어떤 특정한 개인을 대상으로 해서 그 사람을 통해 성욕이 만족되면 모든 것을 얻을 것 같은 확신이 있는 것인지, 에로티즘은 생물학적 짝짓기의 문제로 환원될 수 없는 것인지, 나는 (에라)모르겠다……. 망각은 행복과 자부심과 현재를 준다. 새로운 음식을 먹으려면 배변을 해야 하고 새로운 사건을 기억하려면 오래된 기억은 잊어야 한다. 느려지려면 빨라져야 하고, 빨라지려면 다시 느려져야 한다. 내가 알고 있는 A는 과거의 그 A가 아니고 텍스트 안의 T 부인은 18세기의 T 부인이 아니다(쿤데라는 틀림없이 독자를 조롱하고 읽는 것을 방해하고 있다!). 이것은 창 없는 모나드. 그럼에도 18세기든 20세기든 누구나 사람과 씨름하고 사랑과 씨름하고 속도와 씨름하고 망각과 씨름한다. 나의 욕망은 타자의 욕망이므로. 인물들은 18세기와 20세기라는 시간을 뛰어넘어 새로운 주체로 탈바꿈되었지만 자신의 욕망이 진실로 자신이 소망하는 것인지 그렇지 않은 것인지는 알지 못한다. 아, 결국 새로운 관계가 탄생하면서 비로소 사후에 주체가 출현하는 거로구나 ㅡ 새로운 욕망과 시간을 찾아서 끊임없이 움직이는 게 우리가 하는 일이다. 각각의 인간성과 시간성 때문에 우리는 몽상의 세계로 갈 수 있다. 필요한 것은 조심성쯤이 될까. 느림과 빠름의 속도가 인간을 만나 맥놀이를 만들며 소용돌이 치고 있다. ……내가 너무 어렵게 돌아왔나(분명 쉽지 않은 일이지만 쉽지 않은 만큼 내 받아들임에도 문제가 되긴 한다)?


덧) 책은 일생의 대부분을 서서 보낸다. 쿤데라의 느림 강의도 뱅상의 자지처럼 언제나 서있겠지. 꼿꼿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