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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_롱

『망량의 상자(전2권)』 교고쿠 나쓰히코 (손안의책, 2005)


피노자(Baruch de Spinoza)는 코나투스(conatus)의 개념을 ‘자신의 존재 안에서 지속하고자 하는 노력’이라고 정의했다. 반면 니체(Friedrich Nietzsche)는 어땠나. 그는 스피노자의 코나투스를 이렇게 비판했다. 「자기 보존 명제는 틀렸다. 그 반대가 참이다. 바로 살아 있는 것들 전부가 가장 명료하게 보여 주고 있다. 이것들은 자신을 보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이상이 되기 위해서 행위한다.」 이것은 물론 니체의 ‘힘에의 의지’라는 명제로 뻗어나가는 개념이 되겠지만, 잠시 『망량의 상자』에서의 가나코와 요리코의 경우에 빗대어 볼까. 철로에 떨어진(혹은 떨어뜨린) 행위는 가나코와 요리코를 이어주는 끈이다. 하나가 다른 하나로 환생한다는 소녀들의 생각에서 말이다. ‘그 이상이 되기 위해서 행위한다.’ 여기서 이 문제가 개입한다. 그런데 어찌 보면 가나코가 되고픈 요리코의 행위는 그 이상이 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차라리 망량(魍魎) ㅡ 망자의 간을 먹는 요괴 ㅡ 의 그것과 다름없을 정도다. 그리고 시작되는 교고쿠도의 이야기. 아, 이 장광설, 그의 말대로 결국 뒷맛이 좋지 않게 됐다(작품을 다 읽은 후의 독자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어쨌든 이 작품은 전작 『우부메의 여름』에 비해 다소 커진 스케일과 한층 더 신선한 사건에의 접근방식이 두드러진다. 그리고 이 ‘교고쿠도 시리즈’의 시점은 역시 세키구치여야만 한다는 것을 여지없이 보여준, 소위 압축되고 집적된 이야기가 아닐까 한다. 사실 작품을 읽어나가면서 나는 「우리는 타자의 욕망을 욕망한다.」고 했던 코제브(Alexandre Kojève)의 말이나 라캉(Jacques Lacan)의 ‘나의 욕망은 타자의 욕망이다’와 같은 논제를 떠올렸다. 오히려 인간의 필수적인 항목일지도 모르는 욕망 ㅡ ‘욕구’와는 다른 개념으로서 ㅡ 이 엉뚱하게 분출되는 경우가 종종 있지 않은가. 다시 말해 결여의 모델에 따라 욕망을 사유하는 것이다. 결핍된 무엇인가가 욕망을 불러일으킨다, 라는 것 말이다. 실로 금기를 통해 욕망의 주체가 탄생한다는 바타이유(Georges Bataille)의 통찰과 멋들어지게 교차되는 순간이라고도 할 수 있지 않은가! 의도치 않게 교고쿠도식 장광설로 이야기를 시작하고 말았다. 작품으로 돌아가자. 4개의 사건, 즉 1)가나코 살인미수사건, 2)가나코 유괴사건, 3)사이비 교주 사건, 4)연쇄 토막살인 사건까지. 정말이지 (에도가와)란포식 메스꺼움을 자랑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듯싶다. 전작에 비해 한층 더 강렬하게 다가오지만 다른 방향에서 보면 굉장히 속편하게 치부하고 마는 교고쿠도의 가치관도 이번엔 논란을 빚을 여지도 있고 말이다 ㅡ 물론 그 특유의 장광설에 독자들은 흐물흐물해지고 말 테지만. 아쉬운 점은 또 있다. 다분히 사이코패스적 인물들의 과중한 겹침이나, 특출한 건지 뭔지 잘 모르겠어서 여전히 의구심으로 남는 작가의 문장력, 그리고 몇몇 서브테마 구성에서의 유기적 연관과 치밀함 등등. 한 가지 더 말하자면 가나코와 요리코의 내러티브를 좀 더 구체화하고 확장시켜 끌고나갔으면 하는 것까지. 그러나 이 작가, 꽤나 심혈을 기울였다는 느낌이 지배적이다. 줄곧 중심을 잃지 않고 결말까지 치닫는 일련의 과정에서 한 치의 오차도 범하지 않았다. 마치 시종일관 등장하는 ‘구보 슌코의 장갑’처럼, 평이하달 수도 있는 논제를 가지고 끝까지 독자로 하여금 졸이게 한다. 기술(記述)적 매력이다. 온바코의 이야기와 병치되며 이어지는 구보 슌코의 이야기와 그와 함께 진행되는 교고쿠도식 철학(아, 매력적인 장광설이여!)도 꽤 수준급으로 정제되어 있다. 상자 같은 건물 안에 있는 또 다른 상자 속의 존재, 슈뢰딩거의 고양이처럼 우리는 그것을 열지 않으면 상자 속의 존재를 알지 못할지도 모른다.


덧) 초반에 언급했듯 『망량의 상자』는, '뒷맛이 좋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