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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_롱

『그리스인 조르바』 니코스 카잔차키스 (열린책들, 2008, 신판)


어의 감금, 메타포의 광란, 잠언의 집약, 철학의 실체? 아니면 이 모든 것들을 거부하는 하나의 시(詩)일지도. 읽긴 했지만 어떻게 읽을 수 있었는지조차 모르게 만든다. 『그리스인 조르바』가 그렇다. 이것이 카잔차키스가 본문에서 말한 인도에서, 밤이 깔리고 나서 들리는 나지막한 소리, 먼 곳에서 육식 동물이 하품하는 듯한 느리고 야성적인 노래, 즉 '호랑이의 노래'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결국 '나'와 '조르바'는 『나의 라임 오렌지나무』에서의 제제와 뽀르뚜가, 삶에서의 아버지와 아들로 대체될 수 있으며, 나와 조르바는 문답으로써 서로를 갈구한다. 나에게 조르바는 네살바기 알카에게서 본 붓다의 모습인가 ㅡ 어차피 카잔차키스의 의도에 따르면 신(神)은 인간이 창조한 삶의 도약에 필요한 필요충분조건에 불과하지만 말이다. 그런데 그 성자(聖子) 같고 경박하며 갈피를 잡지 못하는 조르바는 바로 우리이며, 조르바가 다칠까 노심초사하고 그가 떠날까 안절부절 못하는 나도 역시 우리의 군상이다. 그리고 나는 조르바에게 되새김질 하듯 늘상 묻고 또 묻는다. 조르바의 말처럼 '나'는 걸핏하면 그래서, 왜, 라고 묻는 거다. 그러나 나는 그리 할 수밖에 없다. 왜? 나와 조르바가 동일시된다면 그것은 내가 나에게 질문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세상이란 요새에서 우리의 역을 연기한다. 사면을 내려가며 걷어찬 돌멩이가 굴러 내려가는 것을 보고 조르바는 이렇게 말하지 않았던가. 「봤어요? 사면에서 돌멩이는 다시 생명을 얻습니다.」 라고. 조르바를 만난(집어든) 순간부터 (우리의)인생의 껍질은 이미 부화를 알리고 있었던 게 아닐까. 조르바는 터키인이면서 그리스인이었고, 성자임과 동시에 광부였으며, 붓다이면서도 미치광이였고, 나였으며 조르바였다. 나는 조르바를 신기해하다가 동질감을 느끼고, 동경을 지나 그의 말을 되풀이하며, 나중에는 섬기게 된다. 시장의 떠벌이든 무대 위의 바람잡이든 카잔차키스와 조르바, 조르바와 카잔차키스는 인간 존재를 극상으로 끌어올리기에 조금의 거리낌도 없으며 그것을 하나의 싸움터로 인식하고서 탐험하고 의미를 주는 것에 주저하지 않는다. 조르바는 자유를 차지하려 투쟁하고, 영혼을 심화시키는 것을 마다하지 않으며, 인생의 두려움이 주는 협박에 주저 없이 발을 들여놓는다. 그는 우리에게 인간이란 도약하고 충동적이며, 야생의 날것이어야 하고 역치값을 넘어 끝장을 보아야만 비로소 진실된 것이라 한다. 아직 남아 있는 잉걸불을 후후 불어 그것을 다 태우고 나서야만 편히 잠드는, 꼬장꼬장한 악다구니를 보여주지 않았던가. 그러니, 조르바의 이야기가 끝날 때면 불안한 마음이 든다. 그럼 이렇게 얘기하겠지. 「이야기하세요, 조르바. 뭐든 이야기해요!」(p.77)




「분명히 해둡시다. 나한테 윽박지르면 그때는 끝장이에요. 결국 당신은 내가 인간이라는 걸 인정해야 한다 이겁니다.」 「인간이라니, 무슨 뜻이지요?」 「자유라는 거지!」


「산다는 게 뭘 의미하는지 아시오? 허리띠를 풀고 말썽거리를 만드는 게 바로 삶이오!」


「확대경으로 음료수를 들여다보면(언젠가 기술자 하나가 가르쳐 줍디다) 물에는 육안으로 보이지 않는 쬐그만 벌레가 우글거린답디다. 보고는 못 마시지…… 안 마시면 목이 마르지……. 두목, 확대경을 부숴 버려요. 그럼 벌레도 사라지고, 물도 마실 수 있고, 정신이 번쩍 들고!」


「이래 가지고는 안 되겠어요. 이놈의 세상이 좀 작아지든지 내가 좀 커지든지 해야지. 둘 다 안 되면, 이것 참 큰일입니다 그려.」


ㅡ 이상 본문 p.24, 151, 175, 27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