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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_롱

『뉴욕 3부작』 폴 오스터 (열린책들, 2006, 보급판)


런성 타구로 시작해서 플라이아웃으로 끝난다는 기분, 혹은 이 3부작의 실체는 결국 클리셰가 아닌가 하는 느낌을 받을는지 모르겠으나, 수록된 세 편의 작품을 관통하는 것은 쫓기는 자라기보다는 숨어있는 자라서, 인간들이라기보다는 유령들이라서 ㅡ 작품의 의미를 어떻게 변주하여 끌어낼 것인가에 그 포인트가 있다고 여겨진다. 이 판단에 의해 『뉴욕 3부작』은 인물들의 헤맴의 정점에서 자칫 병리적이기도 한 삶의 문제를 어떻게든 우리의 사고 반경 안으로 이동시키고자 하는 의지를 볼 수 있게 한다.



Q. 내(삶)가 마음에 들지 않는데 어째서 계속 살고 있는 건가?


1) 시간을 때우기 위해.
2) 어쨌든 별것 아닌 일이므로.
3) 이건 그저 삶일 뿐이니까.



「유리의 도시」의 공간 중 하나인 센트럴 역에서 한 여자는 마음에 들지 않는 책을 왜 읽는가 하는 퀸의 질문에 시간을 때우기 위해, 어쨌든 별것 아닌 일이므로, 이건 그저 책일 뿐이에요, 라고 답한다. 그리고 퀸은 그 여자의 얼굴에 주먹을 한 방 먹이고 싶은 충동을 참고 일어선다. 이야기 말미에서 퀸의 집에 정당한(그의 입장에서는 그렇지만도 않은) 방법으로 이사를 온 여자 역시 그에게 이렇게 대꾸한다. 「솔직히 말해서 난 관심 없어요. 그건 댁의 문제지 내 문제가 아니니까요.」 그래서 다시 한 번 『뉴욕 3부작』을 곱씹어 보면, 외양을 보고 《섹스앤더시티》인 줄 알았는데 포장을 열어 보니 《존 말코비치 되기》라는 식이다. 그러므로 『뉴욕 3부작』은 ‘유리의 도시에 사는 유령들은 각각의 잠겨 있는 방에 갇혀 있다’ 거나, 타인의 정체를 추적하려고 열어본 마트료시카가 결국은 조금씩 와해되어 가는 나밖에 없었다는 사실이거나……. 내 삶의 사건들에 대한 권리 행사를 더 이상 할 수 없게 될 때, 그 사건들의 고삐를 다시 잡는 것이 유일한 생존 방법일 거다. 그러면 나는 어쩌면 내 삶의 단 한 번뿐일지 모르는 자발적 선택을 하게 된다 ㅡ 그 결과가 어떻게 나타나더라도 말이다(「유리의 도시」에서 퀸은 두 명의 스틸먼 중 어느 쪽을 쫓아야 할 것인지 고민한다). 나에의 선택과 성찰은 곧 그 답이 무엇이든 나라는 인간 자체를 문제시하는 것이다. 즉, 나라는 유일하고 신비한 존재에 의해 나는 내 한계를 알고 희비극 속의 존재로서 있다. 그러나 이것이 내 가치를 폄하하는 행위 또는 도그마티즘의 의미로 사용해서는 안 될 것이다. 세상에서 나의 존재를 지울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나밖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고로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수록된 「유령들」을 읽기 시작하면서 《저수지의 개들》을 생각했지만 그것은 빨리 잊는 게 상책이었다고 판단된다. 동시에 제목부터 ‘3부작’인 만큼 3번은 읽어야 ㅡ 순서는 상관없이 ㅡ 한다는 생각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