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책_롱

『위대한 질문』 레셰크 코와코프스키 (열린책들, 2010)


『위대한 질문』을 펴낸 열린책들의 편집자 노트(웹 카페를 통해 확인)를 보면 이 책 자체를 놓고 '위대한 질문'을 던진다. 나는 왜 이 책에 악행을 저지르는가? 이 책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가? 어째서 아무것도 없는데 무언가를 만들려 하는가? 최선의 편집 형태는 무엇인가? ……그럼 나도 질문을 던진다. 이 책을 읽는 나는 지금 여기에 실재하는가? 나는 이 책을 읽는 행위로써 행복한 것인가? 나는 이 책의 텍스트를 믿어야만 하는가? ……에픽테토스의 철학은 불교의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와 닮아있다. '하늘을 긍정하고 운명을 사랑하라', 또는 '운명의 긍정'이란 하나의 구절로서 표현되는 그것이다. 그래, 이건 쉬이 생각할 수 있는 명제다. 그럼 고르기아스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했고 헤라클레이토스 ㅡ 그는 코스모스(cosmos)를 말한다 ㅡ 는 '모든 것이 존재한다'고 했는데 이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아퀴나스, 데카르트, 스피노자, 칸트, 쇼펜하우어, 니체…… 어쨌든 많다. 저자는 『위대한 질문』에서 30가지의 질문을 한다. 아니 30명의 철학자들이 (초빙돼) 질문한다. 하지만 나는 단 하나의 질문에도 답할 수 없다. 아예 답이란 건 집어치우고, 내가 보기에 나는 답을 들을 생각도 없어 보인다. 아니면 내가 그 흔해빠진, 부정의 부정은 긍정이라는 수식 [~(~a)=a]에서 허우적대는 걸까? 사실 이게 기막힌 논리일지도. 이를테면 허구의 허구를 통해 실재에, 없음의 없음을 통해 있음에 도달한다거나 말이다 ㅡ 그나마 최근 사람인 사르트르의 눈으로는 한심하기 짝이 없겠지만(데우스 엑스 마키나라 욕을 해도 대꾸할 수 없다). 어떤 이유에서든 나는 『위대한 질문』에 대해서, 그리고 위에 나열한 철학자들의 질문에 대해서 오랫동안 설명할 수 없고 그럴 자신도 없다. 내가 왜 그들의 질문에 답을 해야만 하는가(이것도 일종의 멋진 '위대한 질문'이다)? 『위대한 질문』은 총 30명의 철학자들의 입을 빌려 하나씩 질문을 해댄다. 그런데 등장인물(이라 표현하자)의 연대 순으로 19세기, 20세기까지 오다가 갑자기 마지막엔 플로티노스(204~269 혹은 205~270)가 나타난다. 대체 왜? 사실 이 양반도 일자(一者)를 이야기했고 아리스토텔레스나 스토아학파, 고대 그리스철학과 총체적 체계로서 엮여 있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갑작스럽다. 사실 이게 데우스 엑스 마키나가 아닐까? 하고 생각하는 찰나, 이것은 '허섭스레기 질문'이란 걸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