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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_롱

『애도하는 사람』 덴도 아라타 (문학동네, 2010)


애도하는 사람 - 8점
텐도 아라타 지음, 권남희 옮김/문학동네


화불량에라도 걸린 것처럼 무엇인가에, 어딘가에 이르려 하는 사람. 덴도 아라타는 어느 인터뷰에서 말했다. 「실제로 '애도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와의 만남으로 우리에게 어떤 변화가 일어나는가, 하는 쪽이 중요한 게 아닐까.」 이건 죽음이라는 변수에 대한 솔루션도 아니고 사자(死者)에게 명복을 빌어줌으로써 스스로가 위안받으려 하는 것도 아니다. '애도하는 사람'인 시즈토에게서 자기위안적 의미부여에 대한 측면이 언뜻 비치기는 하지만 그게 궁극적으로 『애도하는 사람』이 시사하는 바는 아니라고 본다. 나는 오히려 일상(삶)의 패러디가 아닐는지, 하는 생각을 조심스레 해본다. 왜냐하면 시즈토의 애도하는 행위 자체를 한마디로 딱 잘라 설명할 수 없거니와 특수한 상황에서의 마음의 동작이라는 것이 옳거나 그르거나 좋거나 나쁘다는 자문자답조차 불가능해 보이기 때문이다 ㅡ 일견 시즈토의 애도에는 이유 모를 선의만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약점을 보이며 어른 아이의 느낌을 자아내지만. 내 짐작으로 시즈토는 우선 자신을 위해 애도하고 죽은 이를 위해 애도한다. 그리고 살아있는 자에게는 철저한 무관심. 그럼으로써 이 세상에 부조리한 폭력이나 사고 등으로 죽는 사람은 없어야 한다, 라는 논리가 아니라 사자에 대한 평등한 애도(시선)를 통해 그들을 기억하려 할 뿐이다. 줄곧 죽은 사람과 관계되거나 면식이 있는 사람(3인칭)에게서 이야기를 들은 후 고인(2인칭)에게 말을 걸어 애도한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인간의 존재를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오직 인간 실존과 그에 대한 이해를 통해서 가능하다면 그건 오로지 '나의 존재(살아있는 나)'만이 있다는 편협한 굴레를 벗어나야 가능할 것이다(3인칭에서 2인칭으로 · 2인칭에서 3인칭으로). 이것은 중반에서 마키노가 던지는 「무슨 기준으로 어떤 고인은 동정하고 어떤 고인은 내팽개치는가」 하는 물음에서 드러난다.



덧) 소설 속에서 시즈토(靜人)와 유키요(倖世)는 어느새 행동을 같이 하게 되는데, 의도된 것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으나 그들의 이름에는 모두 사람(人)이 존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