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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_롱

『하늘의 문』 이윤기 (열린책들, 2012, 개정판)


하늘의 문 - 8점
이윤기 지음/열린책들


꼭 종교에 얽매일 필요가 있을까마는, 온갖 문장이 종교(적인 것들)로 점철되어 있어도 좋다. 내가 싫어하는 것은 어쭙잖게 구절을 읊어가며 막무가내로 전도하려는 예수쟁이들이지 선량한 세속은 아니므로. 더군다나 이것은 허구이긴 하나 그의 이야기이고 그의 삶이긴 하나 거짓의 산물인 소설이며 또 소설 속의 소설도 있고 소설을 위한 소설도 있으니 매한가지다 ㅡ 아무리 자전적 소설이라 하더라도 볼라뇨의 음경 얘기는 하고 싶지 않다(그러나 또 해버리고 만다). 의도야 어찌되었건 인간은 '5마일 길'에 휘둘리기 십상이다. 뭐든 피부에 와 닿아야 (거의) 온전히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고 그제야 뭔가를 바꿀 생각을 하기 때문이다. 스스로가 이해하지 못하는데 어떻게 용납할 수가 있겠나. 『삼국지』에서 조조가 읊은 시를 뜻만으로 따져 불길한 소리로 해석해 버리고 죽음을 당한 선비와 『하늘의 문』의 '나'라는 인물이 같게 발음되는 이름을 가졌다면 이것은 우연일까. 그러니 작가는 쓰느라 애달팠겠으나 그것은 읽는 쪽도 피차마차 포장마차인 셈이다. 수취인 불명의 편지를 아무리 써봐야 제대로 당도할 리 없을 테니 말이다. 밀림의 부상자를 태우러 와야 할 헬리콥터가 자기는 죽은 자들만 모집한다며 애꿎은 사람을 주워 훌떡 날아가 버린 것과 다를 바가 없다. 「신은 위대하지 않소. 있긴 할까마는.」 이렇게 뜻풀이를 했다면 조금은 마음이 편해졌을까? 한번 해병은 영원한 해병이고 한번 삐끗한 자는 영원히 삐끗하는데도? 회귀는 회귀일 때가 아름다운(적어도 아름답게 보이는) 법이다. 잡으려는 것과 쫓기는 것이 영원한 술래잡기만 하지 않는다면. 이것은 단지 사악함, 불안함, 제도, 도덕과는 다른 것이다. 일인이역을 하지 않을 바에야 고통을 호소할 데가 없는 까닭이다. 그가 술래일지도 모른다는 불안에 휩싸이면서. 작가의 단편 「하얀 헬리콥터」가 삽입된 것이 분명해 보이는데, 그것이 에리히 레마르크의 소설처럼 멀끔하게 그려지지 않는 것도 그렇다. 이것은 역설적으로 '다른 사람'이 되되 결국은 '(전과) 같은 사람'으로 보이는(회귀하는), 헬리콥터의 날개와도 같다. ……죽으려고 환장한 사람은, 좋게 말해서 미친놈이다. 한번 미친개는 이 세상 어느 누구에게나 미친개이듯, 한번 미친놈은 영원히 미친놈이다. 살 이유가 없어서 죽는다면 다소간의 이해는 해줄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이 제 살 깎아먹는 것을 넘어서 남의 뼈까지 거덜을 낸다면 봐줄 수 없다. 주인공 '나'는 그런 작자다. 마스터베이션을 하면 장님이 되고 불순한 생각을 하면 영원히 고통 받으며 가족 중에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 역시 지옥불에 타게 된다…… 그는 이런 것들이 싫었을까? 천국 아니면 지옥을 달라는 이분법적 사고가 싫었을까? 자꾸만 남을 부대끼게 하는 뭉텅이 같은 무리들이 싫었을까? 그렇다면 그럴 법도 하다. 그는 신을 모시려는 자가 아니라 스스로를 모시려 하는 자였으니. 라즈니쉬 같은 사기(詐欺) 비즈니스맨은 아니었을지언정 「신발과 마음은 문 앞에 벗어놓으시오.」 하고 자신에게 생채기를 내는 능수능란한 사람이었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