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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_롱

『밀어』 김경주 (문학동네, 2012)


밀어 - 8점
김경주 지음, 전소연 사진/문학동네


알, 이 쪼글쪼글해졌다가 팽팽해졌다가를 흡사 내 생애를 통틀어 숨겨온 습속(習俗)의 흔들림으로 하여금 의지를 돋우듯 왼쪽으로 쏠린 것을 느끼고 있다. 쓸쓸한 냄새가 아랫도리 깊숙한 곳에서 저만치 멀어진 이름도 모르는 누군가의 얼굴을 그린다. ……쓸개 빠진 놈을 본 일이 있는지. 노악취미라고 해야 할는지 취미고 뭐고 할 것 없이 태생적으로 무미건조함을 타고났기 때문에야말로 그런 자라고 불러야 할는지는 이 남겨진 글로써 얼마간은 해소가 되리라고 보지만 말이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무표정한 인간의 표본이랄까 무의지의 대변인이랄까 하는 말로도 쉬 설명이 될 것 같으니까. 무감동하게 계절은 바뀌어서 겨울 초입인데도 한겨울인 것처럼 발가락 끝이 시리다. 나는 동상(凍傷)을 두 번이나 입은 기억이 있다. 열아홉 그리고 스물둘. 고등학교를 다닐 적에 운동화 뒤축을 꺾어 신고 다니다가 발뒤꿈치만 얼어붙었다. 느릅나무인지 두릅나무인지 지금도 헛갈리지만 그걸 삶은 물에 발을 담그고 있으면 상처가 낫는다했다. 스물둘에는 신병 훈련소에서, 이번엔 발가락 열 개가 모두 동상에 걸렸다. 이미 오래전이다. 상당한 시간이 지난 과거일 뿐이다. 여자애들이 크리스마스 날에 남학생으로부터 손난로를 받고 좋아하며 깔깔대는 그 따뜻한 웃음, 흔들기만 하면 온기가 흐르는 손난로의 뜨거운 핏줄이 생각지도 못할 만큼 오랜 시간 온기를 떨어뜨리지 않는 것처럼 내 족적도 그러할 테지. 두려움을 생각하니 두려워진다.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일찌감치 내 손가락 끝에서부터 시작하여 항문 언저리까지 스몄던 온기와 무서움. 몇 초에 한 번씩 슬쩍슬쩍 누워있는 사진 속의 몸을 보면서 평온함을 체득하고 이윽고 날카로운 그것을 감지한다(그 아래 보이는 발톱이 흉하다). 사람의 몸에 이런 형체가 달려있다는 것을 깨닫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님에도. 내 살의 일부라는 것은 희한한 일인데 내 살로 저 살을 해한다는 식의 맞부딪힘이 가능하다는 사실만으로도 누구에게도 발설할 수 없는 일이 되어버린다. 그 여자의 살이 까무러칠 때 내질렀던 생각은 물음표를 동반한 느낌표였을까 순수한 온점이었을까. 여음(女陰)이 식기도 전에 침묵이 먼저 알고 여음(餘音)을 느끼듯이…… 그 홧홧한 기운을 나는 못 깨달을지라도 가만히 귀를 기울이면 침묵이 듣고 있는 소리가 들린다. 내가 매력적인 정신병자같이 보일는지 모를 일이다. 지금도 이를 딱딱, 하고 다물어보면 마치 귀에 물이 들어간 것처럼 먹먹하게 울리곤 한다…… 뭔 소리야 씨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