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책_롱

『저녁 무렵에 면도하기』 무라카미 하루키 (비채, 2013)


저녁 무렵에 면도하기 - 8점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권남희 옮김, 오하시 아유미 그림/비채


2001년이었나. 출판사는 다르지만 같은 역자가 옮긴 『무라카미 라디오』 ㅡ 당시에는 심플한 제목이었고, 단 한 권밖에 나오지 않았었다 ㅡ 라는 책이 있었다. 그 후 10년도 더 지난 지금, '무라카미 라디오 시리즈'가 세 권으로 재출간됐다(이 책은 그 첫 번째). 그쪽 사정에 밝지 않으니 지금도 계속 연재를 하고 있는지 어떤지는 모르지만 에세이만큼은 쭉 써 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조만간 그의 새 소설도 국내에 번역될 것 같긴 한데, 소설은 차치하고라도 나는 오히려 에세이 쪽이 더 소설 같다는 기분이 들어서 말이다. 현실보다 더 현실 같은 현실, 소설보다 더 소설 같은 소설, 뭐 이런 논리라면 설명이 되려나. 어떤 작가가 됐건 소설보다는 조금 어깨에서 힘을 뺀 듯한 논조의 글을 읽게 되면 새롭고 재미난 발상이란 것이 더 풍경화처럼 느껴지는 까닭이다(그렇다고 푸근하다거나 반대로 뒤통수를 때릴만한 충격이 있는 것은 아니다) ㅡ 아베 고보의 작품에서였나, 풍경화는 자연 경관이 살벌한 지방에서 발달하고 신문은 인간관계가 소원한 산업 지대에서 발달한다는 문장을 읽은 기억이 있는데, 우리도 매일같이 자고 일어날 때 살풍경한 느낌을 받고 있으니까 말이다. 더구나 에세이집이란 건 태생이 단속적이라서 화장실에 가거나 맥주를 마시거나 야구 중계를 보는 틈틈이 읽을 수도 있다. 그래서 어지간한 중편 소설보다는 빨리 읽게 된다. 아마도 흡연자의 경우 담배 한 개비 피우는 사이에 두세 편 정도는 후딱 읽어버리지 않을까(나는 그렇다). 그래서 아무 곳에나 도그지어를 만들어 놓고 나중에 다시 읽는다고 해도 '이게 무슨 말이지'와 같은 생각은 들지 않는다. 어차피 소설 같긴 하지만 분량이나 흐름으로 따지면 장편(掌篇)의 느낌일 테니까. 하루키는 「레이먼드 챈들러의 소설에 '안녕을 말하는 것은 잠시 죽는 것이다'라는 유명한 대사가 있다.」고 썼다. 그는 '안녕'을 말해도 바로 죽지는 않는다고 토를 달았지만 실은 어떨까. 일단 한번 말해 볼까. 안녕? 그럼 다음에 또 만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