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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_롱

『연필 깎기의 정석』 데이비드 리스 (프로파간다, 2013)


연필 깎기의 정석 - 10점
데이비드 리스 지음, 정은주 옮김/프로파간다


순원과 윤오영의 두 노인이 제각기 독을 짓고 방망이를 깎던 때와 비교한다손 치더라도 데이비드 리스의 연필 깎기는 시공의 차만 있을 뿐 독과 방망이의 경우에 비해 손색이 없다. '연필 깎기의 정석'이라거나 '장인의 혼이 담긴 연필 깎기의 이론과 실제'라는 문구만 들었을 때는 거의가 키치적인 사유의 산물이려니 했다. 「내 평생 이렇게 요염하고 도도한 연필은 처음 봅니다.」 맙소사. 연필을 두고 요염하다느니 도도하다느니 하는 말이야말로 처음 듣는 바이다. 너무 뾰족해서 기절할 뻔했다고? (하이데거를 들먹이며) 그의 연필 또한 '손안의 것'이라고? 펜은 칼보다 강하지만 연필은 그 펜보다도 한 수 위라고? 물론 페트로스키의 『연필』을 읽었을 적에는 정말이지 멋지다고 생각했다(절판에서 벗어나 재출간될 수 있기를!). 그렇지만 『연필 깎기의 정석』은 그야말로 '연필 깎는 법'을 알려 줄 뿐인 거다 ㅡ 다행히도 처음 몇 쪽을 읽는 순간 의심은 곧 사그라졌지만. 「나의 도구 세트에서 연필 다음으로 중요한 것은 작업용 앞치마이다. 앞치마를 두른 남자는 프로페셔널해 보이는 법이다.」 지당한 말씀. 캐주얼한 니트에 물 빠진 청바지, 개구리 똥색 스웨이드 구두를 신은 의사가 있다고 가정해 보자. 우리가 그에게서 느끼는 신뢰도는 백색 가운을 입었을 때보다 몇 계단은 떨어질 것이다. 뾰족하게 깎아진 연필이 고객에게 안전히 도착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비닐 튜브와 눈의 피로를 최소화하면서 오랫동안 집중력을 유지할 수 있게끔 해 주는 (LED 조명이 달린) 머리띠형 확대경, 족집게로 채취한 연필밥, 주문 번호와 날짜 그리고 뾰족함의 등급이 포함된 별도의 라벨과 인증서까지 ㅡ 이 인증서는 일명 '뾰족함 인증서'로, 그와 함께 「뾰족한 연필은 위험한 물건이므로 주의해서 사용하시기 바랍니다.」라는 경고문이 적혀 있다. 희한한 것은 목차를 살펴보다가 발견한 것으로, '샤프펜슬에 대한 짧은 소견'이라는 제목의 장(章)이었다. 그런데 웬걸, 그 장은 단 한 쪽으로 끝나고 만다. 더군다나 오로지 한 문장밖에는 적혀 있지 않다. 「샤프펜슬은 순 엉터리다.」 이자는 장인답게(표현이 좀 이상하지만) 전동식 연필깎이를 무척이나 싫어한다. 그는 전동식 연필깎이를 두고, 사무용품 업계에 사람의 심리를 교묘히 조작하는 자들이 넘쳐난다는 증거라는 둥 연필을 깎는 과정에서 기계가 인간을 소외시키는 방식이라는 둥 일견 궤변을 늘어놓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러면서도 전동 연필깎이 사용법에 상당한 지면을 할애하고 있다. 그것은 '전동 연필깎이가 있을 법한 집에 무단 칩임을 하여 문제의 기계(빌어먹을 전동 연필깎이!)를 찾아내 콘센트를 뽑아낸 다음 나무망치나 쇠망치를 이용해 그 연필깎이를 개박살 낸 후 ‘Your problem is resolved’라는 메모를 남기고서 탈출하는 것'이다……. 우습게도 나는 이 책을 읽고 난 뒤 엘카스코 M430-CN 제품이 갖고 싶어졌다. 그것은 이중날 회전식 연필깎이로, 예산 문제만 없다면 기꺼이 책상 위에 들여놓고 싶은 물건 중의 하나일 것임에 틀림없다. 이 제품의 매력은 바로 위에 달린 유리창일 텐데, 연필깎이 윗부분에 투명한 유리를 덧대어 절삭날이 돌아가는 모습을 관찰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물론 앞서 언급한 예산이 문제된다면 데이비드의 웹사이트에 들어가 잘 깎아진 연필을 주문하는 방법도 생각해 볼 수는 있다. 연필 한 자루에 35달러만 내면 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