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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_롱

『블라드』 카를로스 푸엔테스 (민음사, 2013)


블라드 - 8점
카를로스 푸엔테스 지음, 김현철 옮김/민음사


「모든 것에 부패의 씨앗이 들어 있어요. 사물에는 쇠퇴라는 씨앗이. 사람에게는 죽음이라는 씨앗이.」(p.43) 노스페라투는 뱀파이어와 동의어다. 죽은 후 무덤에서 깨어나 사람의 피를 갈구하는 귀신. 그것은 독일 출신 무르나우 감독의 동명 영화 《노스페라투》에서 시작되었을 것이다 ㅡ 심지어 이런 요소는 나날이 인기를 얻어 영화와 소설뿐만 아니라 게임에까지 적용되었는데, 캡콤에서 만든 <마계촌>, 또 블리자드의 <워크래프트>에는 '언데드'가 등장한다. 더욱이 뱀파이어는 살아있는 자들의 피를 원한다는 점에서 충분히 다의적인 해석이 가능하다. 조금만 찾아보면 볼테르 역시 이에 대해 언급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영국과 파리에는 세리, 사업가와 같이 일반인들의 피를 빨아 먹는 이들이 있다. 진짜 뱀파이어는 공동묘지가 아니라 궁정에서 살고 있다.」 블라드는 이브와 만날 때 욕실에 있었다. 여기에 피는 등장하지 않지만 어딘지 모르게 떠오르는 것이 있다. 에르체베트 바토리라는 여인이다. 저간의 사정은 차치하고, 어느 날 그녀는 잘못을 저지른 하녀를 때리다가 그 하녀의 피가 자신의 얼굴과 팔에 튀게 된다. 그것을 닦던 바토리는 하녀의 피가 닿은 쪽 피부가 하얗고 탱탱해졌다는 느낌을 받는다. 나이 마흔이었던 그녀는, 젊은 여성의 피로 목욕을 하겠다는 계획을 세워 실행에 옮긴다. 『블라드』는 루마니아의 체페슈를 모델로 하고 있는데, 여기에도 역시 바토리라는 여인의 냄새가 풍긴다. 그녀 역시 피 자체만이 아니라 피를 흘리며 괴롭게 죽어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즐겼던 것이다 ㅡ '철의 처녀'나 '철의 새장' 같은 고문 도구들은 이 바토리로부터 시작되었다. 자, 블라드는 루마니아에 위치한 고대 왈라키아 왕국의 왕자였고 그의 아버지 이름은 블라드 드라쿨(Vlad Dracul)이었다. 루마니아에서 '드라쿨'이란 말은 악마나 용을 뜻하는 말로 사용되었으며 당시 블라드가 사용했던 문장 역시 용이었으니 그 이름의 기원을 충분히 유추해 볼 수 있으리라 ㅡ 역시 그가 즐겨 사용했던 처형 도구인 꼬챙이는 루마니아어로 체페슈(tepes)이다. 그런가하면 (사족이겠으나) 『드라큘라』를 탄생시킨 브램 스토커는 뱀버리 교수라는 사람을 알게 되어 동유럽의 뱀파이어 설화에 대해 듣고는 드라큘라 백작에 대한 착상을 얻게 되는데, 그의 소설 속에서 뱀파이어를 연구하는 반 헬싱의 모델이 이 뱀버리 교수라는 해석도 있다. 또한 스토커가 만들어낸 일종의 '법칙'도 실로 꽤 고정화되었다(송곳니, 신사적인 면모, 박쥐로의 변신, 마늘, 십자가 등등). 이러한 것들은 뱀파이어가 등장하는 모든 매체들에서 빼놓을 수 없는 요소들로 굳어지고 말았다. 아마도 뱀파이어의 요건이나 스토리는, 어느 순간 갑자기 출현한 것이 아니라 오랜 시간을 두고 축적된 이야기일 것이다. 물론 『블라드』도 충실하게 기존의 설정을 가지고 오긴 하지만, 스토커의 드라큘라가 그랬던 것처럼 '기독교'와 '위대한 나라 영국'에는 도통 관심이 없다. 이브가 다니는 직장과 인생이라는 저주, 그 저주를 탐내는 블라드의 역사와 인간의 음험함만 있을 뿐. ㅡ 「모든 것에 부패의 씨앗이 들어 있어요. 사물에는 쇠퇴라는 씨앗이. 사람에게는 죽음이라는 씨앗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