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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_롱

『제3인류』 베르나르 베르베르 (열린책들, 2013)


제3인류 1 - 8점
베르나르 베르베르 지음, 이세욱 옮김/열린책들


든 이야(혹은 그 이전의 모든 이야기)는 가이아가 '가장 저렴한 가격으로 냉동 보관된 가장 맛있는 고기들'을 뱉어내는 것으로 시작된다. 젤룩스 냉동식품 로고가 박힌 옷을 입은 고생물학자 둘과 카메라맨은 약 17m의 신장을 가지고 천 년 가까이 살았을 것으로 추정되는 과거의 인류를 발견하자마자 냉동 인간이 되어 돌아온다 ㅡ 베르베르 자신의 책 『개미』에 나왔던 에드몽 웰즈의 후손이 재등장한다는 점(여기저기서 이런저런 방식으로 제 소설을 여러 번 차용하고 있다)에서 어쩌면 이를 통해 '제3인류'라는 것의 정체를 가늠케 하기도 하나, 내가 읽고 있는 것은 1부에 지나지 않으므로 시일을 두고 찬찬히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 이따금씩 간섭하는 가이아의 독백이 있다. 에드몽 웰즈의 『상대적이며 절대적인 지식의 백과사전』을 인용하고 있긴 하지만 그중 시작하자마자 들어서게 되는 '아포칼립스' 항목은 가이아를 1인칭으로 따로 떼어놓은 연유에서 기인하지 않았을까 싶다. 말인즉슨 아포칼립스는 '감추다'라는 동사 '칼립테인'에 부정을 뜻하는 접두사 '아포'를 붙인 아포칼립테인에서 나온 것이며, '감춰진 것을 드러내기', '장막을 걷어 내기'라는 뜻으로 풀이되고 있다. 훗날 이것은 '계시'나 '진리를 드러냄'으로 번역되어 '세상의 종말'과 뜻이 같은 말이 된 것이다. 그러므로 가이아의 독백이야말로 그/그녀가 의식을 지닌 존재인 것이며 우리로 하여금 자신(지금 내가 딛고 있는 이 행성)의 역사를 뚜렷한 의도가 있는 것으로 받아들이게 함으로써 진리를 드러내고 있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 과정에서 가이아가 뱉은 냉동 인간으로 촉발된 먼지 한 자밤이 아포칼립스, 즉 세상의 종말에 가까운 재앙을 불러일으키기에 이른다. 크게 여성화와 소형화를 골자로 진행되는 이야기는 자본주의의 본색, 종교에 바탕을 둔 전체주의, 유전 조작 등과 맞물려 얽히고설키는데, 다비드 웰즈는 묵시록에 등장하는 네 명의 기사를 떠올리고는 털을 자르고 모근을 뽑아 준다는 면도기 광고와 오버랩시켜 그들이 인류의 4중 날 면도기일 거라고 중얼거린다. 그야말로 그가 읽은 묵시록의 네 기사에 관한 글은 장차 인류 문명에 닥칠 일을 묘사한 것이 아니라 과거의 일을 들추고 있다고 판단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가이아 혹은 그들 스스로가 인류를 쳐내는 이유의 섬뜩함이다. 그에 맞설 준비의 일환인 것인지 결국 다비드를 위시한 몇몇은 17cm의 초소형 신인류를 창조해내고야 만다. 최초의 난생 인간 에마슈. 어쩌면 『제3인류』는 『개미』를 모티브 삼아 『파피용』의 과정을 거칠 심산인 것일는지도 모른다. 겨끔내기로 『신』과 충돌할지도 알 수 없는 일이고(사실 나는 『카산드라의 거울』 쪽에 한 표를 던지고 있다). 사실이 그렇다면 이것은 그저 그런 클리셰에 지나지 않겠으나 우리는 아직 베르베르의 새로운 소설을 절반도 읽지 않은 것 같다. 가이아가 자신을 위해 싸워 줄 챔피언으로 인간을 만들어낸 것이 과연 잘한 일일는지는 누구도 알지 못한 채이므로. 그/그녀가 만든 인간들, '실험실에서 탈출한 그 못된 소인들'에게 중요성을 부여하지 않은 것이 큰 실수라는 것을 깨닫기 전까지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