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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_롱

『참을 수 없는 가우초』 로베르토 볼라뇨 (열린책들, 2013)


참을 수 없는 가우초 - 8점
로베르토 볼라뇨 지음, 이경민 옮김/열린책들


돈에는 일정한 규칙이 없다. 혼돈 그 자체가 하나의 질서인 탓이다. 볼라뇨와 매한가지로 지금은 죽고 없는 일본의 어느 작가에 의하면 그는 예술을 공공의 미로 보았다. 문학이 우리 머리끄덩이를 잡고 선배연하는 걸 고깝게 볼 필요가 없다는 것은, 어찌 보면 요란뻑적지근한 그 문학의 혼돈에 체계적인 혼돈스러움, 즉 일종의 그것만의 질서를 부여하는 일일는지도 모르겠다. 그 앞에는 리트머스 시험지처럼 다종다기하면서도 '참을 수 없는' 문학을 향한 용기가 버티고 있기 때문이다. 가장 강렬하게 읽히는 단편 「짐」에는 문학을 하려는 짐과 길가에서 불쇼를 하는 남자 그리고 횃불에 빠진 짐을 뜯어말리는 '나'가 등장하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짐이 아니라 횃불을 손에 든 채 불을 뿜는 사내 쪽이 오히려 볼라뇨 그 자신일 수도 있다는 점이다. 짐은 기발한 무언가를 찾아 쉬운 언어로 표현하고 싶어 하지만 그렇게는 될 수 없었다. 혹은 지금까지는 그러지 못했다. 그러나 홧홧한 기운으로 짐을 울려버린 사내, 나이조차 짐작할 수 없는 그악하게 웃던 남자야말로 짐이 바라고 있던 광고판이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나'는 짐을 그 자리에서 끌어낸 뒤 다시는 그를 만나지 못한다. 짐이 불쇼를 보기 위해 다시 제자리로 돌아갔을지 어땠을지는 모를 일이다. 술 때문에 사람이 죽기도 하지만 술 때문에 사람이 태어나기도 하듯, 횃불을 휘두르는 구체적 형태로서의 문학은 제 스스로를 존명시킬 수도 있고 그렇지 못할 수도 있다. 자, 그런데 보라. 불쇼라는 것은, 그러니까 입속에 용액을 채워 불줄기를 뿜어내는 화려함은 차치하고라도, 횃불을 들어 자신의 맨 팔뚝을 훑고 지나가게 하는 행위는 눈속임에 불과하다. 위로 솟구치려 하는 불의 성질로 보건대 가장 밑 부분인 심지의 온도는 그리 뜨겁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제 살을 닦아세우는, 알쏭달쏭하고 야릇한 몸놀림은 실로 대증 치료에 가깝다. 그렇다면 정말로 불을 가지고 놀던 사내가 볼라뇨 자신인 것인가? 아니면 쉬 짐작할 수 있는 대로 짐으로 대변되는 것이 볼라뇨인가? 그것도 아니라면 불에 미친 짐을 구하기 위해 그를 끌어낸 '나'가 볼라뇨였던 건가? 아니 애초에, 과연 이 중에 볼라뇨 자신이 있기나 한 것일까? 누가 문학을 원하던 자였는지, 그리고 무엇이 문학이었는지, '싸움은 그만'이라던 짐을 통해 말하려 한 볼라뇨의 본심이 어떤 것이었는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다. 그게 무엇이든 간에 추측 혹은 원망(願望)을 넘지 못할 것이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