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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_롱

『모비 딕(전2권)』 허먼 멜빌 (열린책들, 2013)


모비 딕 - 상 - 10점
허먼 멜빌 지음, 강수정 옮김/열린책들


빌만큼 이름으로 장난치는 것을 좋아한다면 이슈마엘부터 퀴케그, 에이해브, 배의 이름인 피쿼드까지 싸잡아 그럴듯한 이야기를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외려 그들의 이름보다 고래에 관한 소위 '고래학' 쪽을 눈여겨보아야 할는지도 모른다. 과연 『모비 딕』이 새뮤얼 엔더비호를 지휘하는 영국인 선장의 팔과 에이해브의 다리를 집어삼킨 고래에 맞붙어 그야말로 지옥 한복판에서 성스러움과 증오심에 충만한 채 운명을 마주하는 이야기이던가? 물론 그렇다. 그러나 그 과정은 지난하되 신비로우며 두서없으나 마법 같고 혼란스럽지만 복된 것과 다르지 않다. 고래 고기가 과도한 기름기 때문에 세련된 요리 취급을 받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멜빌의 묘사로 인해 아름답고 웅장하게 그려진다. 에이해브가 필요로 한 그 단 한 마리의 향유고래, 본래부터 이마에 깃든 고귀하고 전능한 신 같은 위엄이 증폭되어 정면에서 골똘히 바라보면 막강한 신성과 무서운 힘을 느끼게 하는 그 고래, 수수께끼 같은 주름에 싸인 넓은 창공에 비유할 만한 이마를 뽐내는 모비 딕은 무척이나 파격적으로 묘사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인체의 살갗이며 뼛조각, 내장, 신경계와 그 기능을 기술한 매력적인 과학도서와는 다른 종류의 황홀감을 선사한다. 최소 6미터 이상이나 되는 두개골 속에 보석같이 박힌 한줌에 불과한 뇌, ㅡ 그러니까 튀어나온 이마에서 최소한 6미터는 깊숙이 감춰져 있다 ㅡ 반면 놀랄 만큼 굵은 척수의 크기는 그 뇌가 풍기는 왜소함을 상쇄시킴과 동시에 고래의 완전하고 고귀한 영혼을 지탱하고 있다. 그런가하면 인간이 존재하지 않았을 때부터 심해의 정원에 분무기로 물을 뿌려 온 신비한 메커니즘은 또 어떤가. 이슈마엘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호흡하기 위해 수면에 떠오른 고래를 잡는 것은 고래잡이들의 기술이 대단해서가 아니라 고래의 생리작용 때문이라고 ㅡ 「향유고래는 생애의 7분의 1만 숨을 쉬니, 이를테면 일요일에만 숨을 쉬는 셈이다.」 바다에 거주하는 이 괴물의 숨통이 물을 뿜는 통로로만 뚫렸고, 그 긴 통로에 이리 대운하처럼 열리거나 닫히는 일종의 수문이 달려서 공기는 아래로 내려오고 물은 위로 배출되기 때문에 목소리가 없는 이 무지막지한 괴물의 분무질은, 낙타가 보조 밥통 네 개에 물을 채워 사막을 건너듯 한 시간 이상이나 버틸 수 있는 생명력을 몸에 비축하는 행위인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생리작용에 과학적 호기심이 발동하여 가까이 갔다가 뺨과 팔의 살갗이 벗어진 사람이 있는 것처럼 고래가 뿜는 물기둥 근처를 얼씬거리는 것은 그다지 현명해 보이지 않는다. 우리는 이미 미로처럼 얽힌 국숫발 같은 관이 고래의 갈비뼈 사이와 척추 양쪽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고 고래가 수면에 나왔다가 잠수할 때면 산소가 공급된 혈액이 그 관에 가득 차게 된다는 것을 이해했기 때문이다. 「오, 이 순간 나는 인생 최고의 슬픔 속에 내 인생 최고의 위대함이 들어 있음을 느낀다 (...) 모든 것을 파괴할 뿐 정복하지 않는 고래여, 나는 너를 향해 돌진하고 끝까지 너와 맞붙어 싸우리라. 지옥 한복판에서라도 너를 향해 작살을 던지고, 가눌 수 없는 증오를 담아 내 마지막 숨을 너에게 뱉어 주마 (...) 빌어먹을 고래여, 내 갈가리 찢길지언정 네 몸에 묶여서라도 너를 추격하리라! 그러니, 창을 받아라!」 일갈과도 같은 에이해브의 외침을 모비 딕은 과연 제대로 듣기나 했던 것일는지. 『모비 딕』은 분명 고래의 포획으로 시작된다기보다 고래를 잡기 위한 일련의 여정을 이야기하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사적(私敵)을 대하는 선장의 클라우제비츠 식 사생결단 방법론이 간섭하지 않는다면, 바다라는 밀실에 갇힌 선원들의 얼굴을 일일이 불빛에 하나씩 비춰봐야만 한다면 그것은 얼마나 지루하기 짝이 없을 것인가. 그것은 모비 딕과 조우할 때까지 우리로 하여금 두고두고 괴로움에 사로잡히게 만들 것임이 빤하다. 그렇다면 이러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모비 딕을 추격할 각오가 되어 있는 자들, 더군다나 흰 고래의 아가리에 도사린 위험을 기꺼이 감수하려는 그들의 시도는 주저 없는 찬사를 받아 마땅하지 않겠나. 그렇기 때문에야말로 ㅡ 흉측한 소문과 불길한 전조에 위축된 사람들이야말로 뱃머리 갑판에 앉은 채 오래 두드리지 않아 약간은 질긴 고래 고기 스테이크를 먹을 자격이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