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책_롱

『밤이 선생이다』 황현산 (난다, 2013)


밤이 선생이다 - 8점
황현산 지음/난다


학이 무엇인지에 관한 농담 하나 말해주겠다. 데이트 약속이 잡힌 한 청년이 아버지에게 조언을 구했다. 「아빠, 정말 긴장돼서 그러는데요, 갑자기 말이 막히면 무슨 이야기를 해야 될까요?」 아버지는 말한다. 「아들아. 3F가 있단다. 음식(food), 가족(family), 철학(f(ph)ilosophy)을 말하는 거지.」 그러자 아들이 말한다. 「알았어요, 꼭 기억할게요.」 그렇게 아들은 데이트를 하러 나갔고, 저녁을 먹은 후 자동차 안에서 데이트를 즐기게 되었다. 그러다 정적이 찾아왔고, 아들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궁리한다. 이가 덜덜 떨릴 지경이었다. 아하, 아버지의 조언을 떠올려 보자. 「그런데 메리, 아스파라거스 좋아해?」 「글쎄, 별로 안 좋아해.」 「그럼 형제가 어떻게 돼?」 「형제는 없어.」 「좋아, 그렇다면 너에게 오빠가 있었다면, 그가 아스파라거스를 좋아했을까?」 이게 철학이다. ㅡ 팟캐스트로 진행된 대화를 엮은 『철학 한입』에 나오는 글이다. 고요한 해 질 녘의 바다 같은 산문집을 낸 이 상냥하고 도저한 선생의 것 또한 이와 크게 다르지 않으리라(나는 이것을 고종석의 글이 주는 것과 다른 쾌감이라 여긴다). 최근 들어 레비와 우엘벡이 주고받은 편지(『공공의 적들』)를 읽어서인지 『밤이 선생이다』는 조금 더 침착하고 가라앉은 느낌을 준다. 행동하는 철학이라 하기엔 조금 거리가 벌어져 있지만 책상머리 논고라 잘라 말하기에도 온당한 표현은 아닐 듯싶다. 데이트를 즐기는 청년이 아스파라거스와 형제만으로도 쉬 철학의 첫걸음을 뗀 것과 같이, 우리도 매한가지로 '모자 쓴 사람이 누구'인지를 알아내는 갈림길에서 머뭇거릴 필요는 없을는지 모른다. 시작과 끝은 외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늘 사이좋게 들러붙어 있는 까닭이다. 선생의 전공이 아닌 이야기를 모은 이 첫 산문집은 최근 꽤 입길에 오르고 있는 모양이다. 그래서였는지 외려 읽고픈 마음이 들지 않았었다. 내키지 않은 것이다. 못된 습성이라 비꼬는 작자들이 있어도 부러 열기가 사그라질 때를 기다려 손에 넣었다. 물론 당분간은 이러한 분위기가 죽 이어질 것 같긴 하나 쓸모없을지 모르는 객쩍은 용기를 내어 보고 싶었다. 그러나 지금 와서 돌이켜보건대, 이 책을 출간되자마자 읽었다면 멋모르고 빠져 앉은자리에서 끝장을 보았을지도 모르겠다. 꾸준히 당기는 아침 커피 같은 글이다, 여러 모금 나누어 마셨다 ㅡ 일전에 이런 말을 들었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책장 넘기는 것에 충분한 시간을 들인 것은 꽤나 잘한 일이었다고 결론지었다. 선생이 실은 캐비어 좌파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도 사실이나 그것은 쓸데없는 우려로 그치고 말았다. C10H14N2라고 대문짝만하게 끼적여 놓아도 이것이 니코틴인 줄 모르는 사람은 죽었다 깨도 그 정체를 알 수 없다. 인간과 사물에 천착한 이 산문들로 하여금 저 화학식이 설명하는 기본 성질과 빛깔만이라도 핥게 된다면 이로써 서툴 수밖에 없는 상념과 반성의 시간이 비로소 선생질을 하게 되지 않을까. ……그럼에도 나는 아직, 모자 쓴 사람이 누구인지를 알지 못한다.





책을 읽는 사람과 모자를 쓴 사람과 낚시질을 하는 사람을 함께 그린 그림이 있다. 문제는 이 그림에서 모자를 쓴 사람은 누구인가를 알아내는 것이고, 요구하는 답은 그 모자 쓴 사람의 그림을 손가락으로 짚으며 「이 사람이에요」라고 말하는 것이다. 벌써 한글을 읽고 쓸 줄 알며, 간단한 셈도 곧잘 해내는 이 아이가 모자 쓴 사람을 못 알아볼 수는 없다. 그러나 아이는 매우 난감한 얼굴을 하더니 이렇게 되물었다. 「내가 어떻게 모자 쓴 사람의 이름을 알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