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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_롱

『팽 선생』 로베르토 볼라뇨 (열린책들, 2013)


팽 선생 - 10점
로베르토 볼라뇨 지음, 남진희 옮김/열린책들


『제3제국』보다 세련되고 직접적이지 않다. 그리고 그보다는 복잡한 구조를 띤다. 소설은 카렌 두베의 『폭우』만큼은 아니어도 시종일관 비에 젖어있는 축축하고 서늘한 기운이 지배적이고, 은밀하고 간접적이게 그리고 입을 열어 말하기보다는 은유를 통한 보여주기의 방식을 택하고 있다(더군다나 끈질기다). 어떤 의미에서 보자면 살아있는/살아남은 모든 것에 저주를 내리고 있는 것 같기도 하지만 ㅡ 팽 선생이든 누구든 ㅡ 볼라뇨는 그것조차 잘 알 수 없게 만들어 버린다. 죽어가는 것을 목도하고도 방관하려는 자와 묵살하는 자, 문제제기를 하였지만 나아가 어떤 행동도 취하지 않는 자, 그것을 개선하려고 하지만 종국에는 외려 그 스스로가 죽어갈 뿐인 자. 어느 쪽도 재미없는 인간이며 유령 같은 인물들이다. 어쩔 수 없는 분노와 선험적 도발이 진득하니 밴 이 작품은 내전과 전체주의라는 배경을 지렛대 삼아 긴장된 고독감과 불안감을 그리고 있는데, 팽 선생은 시인 바예호에게 다가오는 죽음을 제 몸에 들러붙은 젖은 외투로 인식한 채 보수적이고도 자기 합리화적인 진구렁에 흔쾌히 발을 들이밀고 만다. 여기서 다시 한 번 분명히 드러나는 점은 중간자적 위치에서 어슬렁거리는 것이 누군가를 호리는 엄펑소니와 크게 다를 바 없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물론 팽 선생은 떨어지는 빗방울을 그대로 맞으며 자신의 머리 위를 덮으려 하는 악의 근원에 대해 의문을 품고 심지어 그것을 쫓기까지 한다. 그러나 곧 닥친 체념과 혼돈, 암울한 날씨/무드, 비웃음, 공격, 손쉬운 타협의 문고리를 덜컥 잡아버린다. 최면요법가인 스스로가 도리어 이 세계가 내뿜는 불길하고도 음습한 최면에 힘을 잃는 것이다. 그의 자조처럼 ㅡ 뭔가 불분명한 것이, 알 것 같기도 한데, 그렇다고 무엇인지 확실하게 감 잡을 수 없는 것, 그 냄새가 잠자리까지도 쫓아올 것만 같은 불안함. 어딘지도 모르는 건물에 갇혔을 때조차 그는 어둠 속에서 들려오는 바예호의 딸꾹질을 누군가가 꾸며 낸 거짓이라 추측하지만, 실은 그러한 단정조차 거짓의 산물이었을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나마 극장에서 상영되는 영화로 대변되는 것이 아마도 이 소설에서 가장 직접적으로 부각되는 것일 텐데, 그마저도 차크몰(하필!) 옆에 선 인물이 쌍안경으로(고작!) 검은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 장면을 끝으로 하고 있다. 실질적으로 『팽 선생』은 만질 수조차 없는 유령 같은 세계에서 지내는 유령 같은 사람들을 내세워, 방향성을 상실한 개체 하나와 그 개체들이 모인 다수의 또 다른 개체 덩어리 그리고 시작과 끝, 머리와 꼬리가 불분명한 모든 것들에 대해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시인이자 가난했지만 죽고 나니 유명해지겠다는 마지막 말은, 어쩌면 수많은 팽 선생들에 둘러싸인 볼라뇨 자신을 보는 것만 같아 더 아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