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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_롱

『풍아송』 옌롄커 (문학동네, 2014)


풍아송 - 10점
옌롄커 지음, 김태성 옮김/문학동네


커는 아내 자오루핑이 리 씨 성을 가진 그 빌어먹을 작자와 몇 번이나 잠자리를 했는지, 집뿐만이 아니라 그의 거처에 가서도 일을 치렀는지, 그는 나보다 나이도 많은데 어떻게 절정을 느끼게 해주었는지, 그 오르가즘은 어떠한 유형이었는지 따위를 걱정한다. 그는 공자가 채록했다고 알려진 『시경』을 연구해 그 성과를 인정받고 싶어 하지만 양커의 그러한 노력과 정신은 곧 강탈당하고 오래 지나지 않아 모래먼지 폭풍 사건에 휘말려 정신 이상자로 몰리고 만다. 하지만 정신병원 원장실에는 올라타면 쉬지 않고 달려야만 하는 특수 전기치료기, 환자를 원하는 대로 움직이게끔 고안된 장치가 마련되어 있었으므로 양커는 한 번 더 무릎을 내어주며 ㅡ 아내의 간통을 목도했을 때 쏟아내었던 「미안합니다. 정말 미안해요. 인기척을 먼저 하고 들어왔어야 했나 봐요.」 그리고 (아주 힘차게) 무릎을 꿇고서 호소했던 「지식인으로서의 명예를 걸고 말하건대 다시는 이런 짓을 하지 않겠다고 약속해 주십시오.」 ㅡ 두려움을 내비친다. 이에 원장이 제안하는 것은 양커가 병원 환자들을 상대로 『시경』을 강의하는 것이다. 환자들이 강의를 듣기 싫어하면, 강의에 박수와 환호성을 보내지 않기만 하면 그의 병은 완치될 것이고 곧 퇴원하여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라 양커를 어른다. 그렇지만 이미 그의 머릿속은 미로 같은 후퉁(胡同)이 되어버린 지 오래인데 웬걸, 엉뚱하고 조리가 서지 않는 강의 내용에도 불구하고(그렇기 때문에야말로) 병원 안 환자들로부터 원치 않는 박수 세례를 받고 혼란스러워한다. 그러나 그는 병원을 탈출한 뒤 이번에는 진짜 정신 이상자로 변모한 것이나 다름없다(전혀 매력적이지 않은). 그가 6년 만에 돌아온 고향은 황폐하기 그지없을뿐더러 옛 애인 링쩐은 그저 과거에 머물러있는 여인에 불과하다. 그런 와중 링쩐이 자신이 운영하는 가게의 어린 소녀 씽얼에게 들려 보낸 목합 속 세 겹의 비단에 싸인 것은 무엇이었을까. 붉은 비단을 걷어내자 노란 비단이 나오고, 그것을 치우자 드러난 또 하나의 초록 비단. 빨갛고 노란 중국 국기 속에 담긴 인간들의 정신적 방탕이기라도 한 것일까 ㅡ 중국에서 '초록색 모자'는 배우자의 외도를 의미한다고들 한다.




「지식인들도 이 나무랑 똑같은 것 같아요. 뿌리는 남몰래 돼지우리 밑에 숨기고 몸통과 가지, 잎은 돼지우리에서 십만 팔천 리나 떨어진 곳으로 피해 있거든요. 교수님 같은 지식인들은 가짜로 절개를 지키는 척하는 나무예요, 맞죠?」



소위 인텔리겐치아를 까발리고 짓밟으려는 시도는 씽얼의 말을 통해 이루어진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그녀는 교수님처럼 학식 있는 사람들은 하고 싶은 일이 있어도 감히 입 밖에 내지 못한다는 것을 안다며, 자신과 잠자리를 갖지 않을 거라면 링쩐에게 잘 얘기해달라는 부탁을 할 뿐이다(고작 다음 날의 낮잠을 구걸하는 것이다). 80년대 끝자락 부패 척결과 자유 쟁취를 주장하며 민주학생운동을 벌였던 사람들처럼 모래먼지 폭풍이라는 상징적 악에 대항했던 모교의 학생들은 어떨까. 과거에는 어땠을지 모르지만 지금은 그들 역시 시험에 합격하지 못하거나 논문이 통과되지 못해 사과 봉지를 들고서 지도교수의 집 앞을 두리번거리는 존재가 되었다 ㅡ 죄다 '나쁜 놈들'만 살아남았다(혹은 양산되었다). 양커도 다를 바 없다. 사창가가 즐비한 거리에 파묻히고 온 뒤에도 그것을 들킬까 저어해 속으로는 인정하면서도 짐짓 위선을 떨며 재차 절개를 지키는 척하는 나무 흉내를 낸다. 처음에는 '머리 쓰다듬기'의 효력을 의심하다가도 이내 자신은 교양 있는 지식인이라는 굴레에 (또다시!) 편입되는 것을 보면 혀를 차지 않을 수 없을 지경이다. 물론 그 진중한 의식은 훗날 부메랑이 되어 돌아오지만 지칠 대로 지친 지식인 양커의 정신 이상자로서의 사유는 링쩐의 죽음에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내가 널 춥게 만들어주지. 아주 춥게 만들어주겠다. 더 추워졌다가는 하느님마저도 이 도마 위에 얹어놓고 잘게 썰어버리고야 말겠어.」 출상 음식을 준비하며 고기와 뼈를 자르던 조리사의 중얼거림만이 양커에게 내려진 유일한 저주일 터이지만, 우리의 고매하신 지식인 선생이 제 손으로 돼지우리를 파헤쳐 스스로의 뿌리를 걷어내기라도 할 것인가 ㅡ 「씨발, 누구든지 지식인을 쉽게 속일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말란 말이다.」 곰곰 생각해보면 말미의 오줌 갈기기 시합(「이곳에 오기 전 우리는 오줌도 함부로 갈기지 못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이라는 배설 또한 무장된 식자층의 단단한 기제에 조소를 끼얹는 행위이건만, 양커라는 작자의 계획은 그가 발견한 『시경』 고성이라는 공간에 모인 여러 남녀로 하여금 불평 없이 원하는 상대를 골라 밤을 보내기 위해 마련한 게임에 불과하다. 이 오줌 갈기기 시합은 끝까지, 정말이지 끝내 한 번 더 양커로 대변되는 이들을 미화할 수 있는 여지로 둠으로써 손창섭의 「잉여인간」처럼 결말까지 박무를 깔아놓은 듯한 뉘앙스를 풍긴다(그러나 언제 걷힌 적이라도 있었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