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소아와 페소아들 - 페르난두 페소아 지음, 김한민 옮김/워크룸프레스(Workroom) |
끊임없는 분절과 사뿐하지 않은 불친절함이 잔뜩 짜증이 나 있는 상태를 유지하게 만들고 더러는 화를 내게 한다. 심지어 페소아의 글에 대한 정립된 감상이라는 게 있기나 할까 싶다ㅡ 앞서, 그의 텍스트 자체에 골격이란 게 있기나 할까? 나는 내가 말하려는 것이 잠시 후에 말해진다는 게 겁난다. 지금 하는 내 말들은 내뱉는 즉시 과거에 속할 것이므로(페소아의 텍스트 「선원」의 인용). 페소아의 표현대로 그가 창조한 존재하지 않는 패거리(단순한 필명으로서가 아닌 이명[異名]의 구조적 난립 = 나는 내가 아닌 이 세계의 모든 사람)로 하여금 모든 것을 실제 세계의 틀에 맞춘 대가, 또 자신과는 상관없이 독립적으로 이루어진 각각의 관점에 대해서도 나로서는 확고하게 이해할 길이 없다. 읽으면 읽을수록 생매장되고 있다는 기분만 들 뿐이다. 『불안의 서』만 보더라도, 시작만 놓고 보면, 그것은 괜찮은 경우 『율리시스』처럼 하나의 소설로 읽힐 수 있을는지도 모른다(조이스보다는 친절한 편이니까). 비록 분절되어 있다고는 하나 그래도 『페소아와 페소아들』에 모인 어지러움보다는 쾌적함을 덜 앗아간다ㅡ 그러니까 제목에 '페소아들'이란 단어를 갖다 붙인 것은 실로 훌륭한 착안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막상 책장을 넘겨보면 위고의 성(性)에 관한 메모와 같이 알쏭달쏭한 면면이 드러나 있다. 더군다나 '페소아'라는 것 역시 현실의 페소아와는 다른 이명으로서 동작하고 있다고 봐야 할 마당에 말이다(타부키의 머릿속에는 무슨 생각이 떠올랐을까?). 해럴드 블룸이 어떤 이유에서 페소아를 좋아했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지만, 그는 휘트먼의 연장에 있다는 이유로 페소아의 이명 '알바루 드 캄푸스'를 선호한다고 했다('페르난두 페소아'보다도), 스스로를 문학으로 전환했다는 점에서만큼은 페소아를 한껏 추어올림으로써, 기존의 시에 '당황스러울 정도의 불쾌감'을 보인 태도에 대해 의문을 품는 동시에 그를 칭찬한다. 이는 솔직히 내가 페소아를 바라보는 것과는 조금 다르다고 해야겠다. 혐오스런 결탁(블룸에 의하면)에 맞선 존재의 숭고함은 차치하고라도, 그를 또렷이 읽어낼 수 있는 재주가 내게는 없는 까닭이다. 아니면 나를 온전히 설득시키지 못한 페소아의 책임에 무거운 압력을 가해야 할 것이다.
덧) 위에서 말한 '위고의 메모'라는 것을 살피면― 그는 여성 편력으로 인한 질투를 피하기 위해 몇 개의 암호를 사용했는데ㅡ 이를테면 n은 나체를, osc는 키스를, pros는 매춘부를 가리키며ㅡ 그것은 다음의 것들처럼 적힌다.
9월 13일: 앙졸라 n을 봄.
9월 17일: Pros 베르테에게 원조비, 피갈 9가, n. 2프랑.
9월 23일: 에밀 타파리, 시르크 가 21번지, 7층 1호. os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