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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_롱

『다섯째 아이』 도리스 레싱 (민음사, 1999)


다섯째 아이 - 8점
도리스 레싱 지음, 정덕애 옮김/민음사


질감이 드는 다른 종족을 다루듯 혹은 치매를 앓는 노인을 꺼리듯 아이를 대하는 데이비드를 탓할 수는 없다. 그의 아내 해리엇도 마찬가지. 기어이 태어나고야 만 로즈메리의 아이 같은 그들의 다섯째 아이 벤에 관한 이 소설은, 어떤 유형의 윤리관도 뚫지 못하고(레싱 자신도 신경 쓰지 않는다) 어떤 비난도 쏟아내기가 어렵다. 해리엇은 입을 열어 타이르는 교육이 효과를 발휘하지 못하자 어린 벤으로 하여금 자신을 버렸던 공포의 기억을 떠올리게 함으로써 새로운 훈육의 방식을 터득했고, 자신의 바로 그 아이가 성장함에 따라 이번에는 그녀 쪽에서 곧 다가올지 모르는 공포에 치를 떤다. 사악한 유아기의 벤은 보호는커녕 아무것도 갖추어지지 않은 오물의 틈바구니에서 방치되었다가 다시금 모성애를 되찾은 해리엇의 손에 의해 이탈과 합류를 경험한다. 제 형들과 누나들을 위협하던 (여전히 악마 같은) 벤은 바로 위 형의 목을 조르는 것에는 실패했으나 개를 죽이거나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 하루 종일 집 밖을 서성인다. 만약 보통의 가정이라면 어떨까. 노년으로 접어든 남녀와 이제 막 학교에 들어간 아이들 사이에서는 그들의 아들딸이자 부모인 중간자를 건너 뛰어 모종의 계약이 성립되곤 한다. 가족의 변화, 그러니까 조부모와 손주라는 관계가 탄생하게 되면 그들 사이에는 일종의 동맹 관계가 맺어지고, 가정의 헤게모니가 조부모로부터 부모로 이양되는 시점(할아버지와 할머니가 노년에 접어들었다는 것이 분명해지는 시기)에서 그들은 사사건건 간섭하는 부모보다는 늙수그레하며 너그럽기까지 한 조부모와 좋은 한 쌍을 이루게 된다. 그러나 『다섯째 아이』에서는 그렇지 못하다. 개는 물론이거니와 심지어 제 형마저 살해하기 위해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던 벤은 외할머니까지 상처를 입게 만들며, 데이비드와 해리엇으로 시작된 이 일가를 파탄으로 몰아넣는다. 그들의 '다섯째 아이'는 한 가정 안에서 정신 이상자 혹은 괴물 취급을 받으며 성장하고 있는 거다. 그리고 레싱은 다운 증후군을 앓는 아이를 등장시킴으로써 벤을 그보다 더 몰아세우기에 이른다. 물론 해리엇이 벤을 되찾아 오는 것을 온전히 모성애를 발로로 하여 진행된 것이라고만은 볼 수 없다(반대의 경우에도). 그녀는 어머니의 역할에 집착한 나머지 아이가 아닌 자신을 위해 한 번 버렸던 벤을 미친 듯이 갈구하지 않았나. 그녀는 벤으로 인해 상처받은 다른 가족들을 껴안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벤에게 사랑을 쏟지도 않았다. 수용할 수 있는 범위와 한계, 바로 이 '범위와 한계'라는 것이 간섭함으로써 이 소설은 우리를 불편하게 만든다. 인물들이 이물질로 생각하는 벤에게 나 역시 애정을 느끼지 않는다. 그러나 벤을 제외한 나머지 가족들에게 또한 어떠한 사랑의 감정도 들지 않게 된다. '인간이란 종족은 동물과 달리 (이성이란 녀석이 끼어들어) 야만스럽지 않다'는 특성은 인간 스스로가 정해버린 것이다. 우리는 우리만의 규약을 만들고 때에 따라서는 위대하게 보이는 알쏭달쏭한 함의를 만들었다. 어떤 동물의 어미가 기형의 새끼를 버리는 것을 보고 우리는 혐오감을 느끼지는 않는다. 설사 혐오스럽게 보이더라도 그것은 그들만의 문제이니 더 이상 신경 쓰지 않는다(「그건 동물들의 세계잖아.」). 하지만 이것이 인간의 경우라면 어떤가. 그 꺼림칙한 허상과 공포의 세계가 『다섯째 아이』 속에 들어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