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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_롱

『범퍼스티커로 철학하기』 잭 보웬 (민음인, 2012)


범퍼스티커로 철학하기 - 8점
잭 보웬 지음, 이수경 옮김/민음인


퍼스티커에서 정말로 철학이나 현학의 증거를 찾고 싶지는 않다. 그걸 유심히 쳐다본다고 한들 내 머릿속에 다른 생각이 떠오를 리 없고 다른 차들에 어떤 장식이 되어있는가 따위에도 신경 쓸 시간이 없다. 행인 중의 하나인 나 역시 갈 길이 바쁜 사람이다. 더군다나 횡단보도에서 녹색 신호를 기다리는 동안, 이때도 매한가지로 어떻게 생긴 차에 어떻게 생긴 운전자와 동승자가 탑승하고 있으며 저것이 어떤 회사의 엠블럼을 붙이고 있고 또 어떤 내용을 담은 범퍼스티커를 붙이고 있는지 따위에는 하등의 관심이 없지만 말이다, 그럼에도 슬쩍 고개를 돌리는 수고로움을 감수한다고 치자, 우연찮게 어떤 범퍼스티커가 내 눈에 들어왔다고 해도 영 재미없는 것들 뿐이다. 깨진 유리 무늬, 총알에 박힌 뒤쪽 범퍼, 밴드 모양의 스티커, 초보 운전(어서 와, 초보자 뒤는 처음이지?), 아이가 타고 있어요……와 같은 흥미 제로의 문구들밖에는 볼 수가 없다ㅡ 확실치 않은 내 기억력에 의하면 「아이가 타고 있어요!」는 지금 이 차에 어린아이가 있으니 전방주시 의무를 위반하지 말라는 뜻이 아니라 만일에 발생할 사고에 아이부터 구해 병원으로 후송해 달라, 라는 의미가 있다고 한다. 하여간 어쨌든 간에, 한국에서는 '아이가 타고 있어요'처럼 후방 또는 마주오는 차량의 운전자가 '읽어서 의미를 파악해야 하는' 범퍼스티커를 별로 본 적이 없다. 선거 때 특정 후보를 지지한다는 것도, 문화예술의 각성을 촉구한다는 문구도, 동물학대를 반대한다는 의미의 스티커도, 이 책에서 소개하고 있는 의미심장하게 여겨질 법한 것들도. 내가 『범퍼스티커로 철학하기』를 읽기 전 다소 오해한 것이 있는데, 이 책은 범퍼스티커의 역사나 그것이 우리의 사회문화를 어떤 식으로 반영하고 있는지에 대해 기술한 것이 아니다. 이를테면 『매트릭스로 철학하기』, 『라디오헤드로 철학하기』, 『우주의 끝에서 철학하기』, 『헝거 게임으로 철학하기』, 『영화로 철학하기』, 『나꼼수로 철학하기』 등과 같이 다종다양한 '철학하기'의 문맥에서 읽으면 될 것 같다. 재미? 재미야 물론 있다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