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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_롱

『나의 대중문화 표류기』 김봉석 (북극곰, 2015)

나의 대중문화 표류기 - 8점
김봉석 지음/북극곰


지 한 개마다 책이나 영화를 추억하는 김봉석의 이야기ㅡ 무턱대고 쌈마이스럽거나(덜 유치하게 표현해 B급에 가깝거나) 순간순간의 소비적 오락에 취해 진득하니 표류하거나. 그는 사춘기 시절 강해지고 싶다는 이유와 함께 자연스레 접하게 된 이소룡, 성룡, 이연걸을 꼽는데, 미안하지만 난 그쪽보다 헤싱헤싱한 적룡이 등장하는 《영웅본색》을 더 좋아한다. 기억할 수 있는 한 그 영화를 열 번 이상 보았고, 시리즈 전체를 통틀어 말하면 도합 서른 번 이상 본 셈이다. 죠스바 국물 뚝뚝 떨어지는 피 칠갑의 면상과 괜히 어깨에 힘주게 되는 멋진 대사들을 따라올 영화는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물론 이소룡 쪽을 평가 절하하는 것은 아니다. 무시무시한 갈고리와 맞짱을 뜨는 《용쟁호투》의 일명 '거울 신', 《사망유희》의 허위허위 잘도 싸웠던 꺽다리 흑인, 어느 것 하나 빼놓을 수 없으며, 명절만 되면 죽지도 않고 찾아오는 성룡도 싫지 않다. 그럼에도 나는 늘 주윤발의 성냥개비 속에 표류해있었다. ……아니, 그래서 어쩌라고? 이렇게 나온다면 할 말은 없겠지, 나나 김봉석이나. 하지만 『나의 대중문화 표류기』는 '그래서 이러이러하다'는 것이 아니라 '그땐 그래서 그랬(을 거)다' 하고 말한다. 솔직히 말해 김봉석이 팀 버튼의 영화 중 《배트맨 2》를 가장 좋아하든 말든 나와 무슨 상관이 있겠나? 물론 나도 배트맨 시리즈 중에서 마이클 키튼과 대니 드비토의 그 영화를 가장 좋아하긴 하지만(왠지 조커보단 펭귄 쪽이 더 좋다). 그런가하면 학생운동 시절을 겪은 그가 하루키의 와타나베(『노르웨이의 숲』)를 떠올리는 것 또한 나와는 별상관이 없다. 그러나 세대는 다소 다를지라도 같은 8, 90년대를 보냈다는 점에서 심한 동질감을 느낀다(재미있는 부분도 있고 그렇지 않은 곳도 있어서 책장을 훌쩍 건너뛸 수 있는 선택의 기회도 주고 있다). 그런데 대체 나는 그 당시에 뭘 하고 있었을까? 보물섬, 만화왕국, 점프를 읽고 다이 하드나 리썰 웨폰 유의 영화를 보고 맥스, 나우로 대변되는 팝 일반을 들었다. 아버지의 쌈짓돈으로부터 얻은 마이마이에 카세트테이프를 넣어 들으면서 오토리버스의 신통방통한 기능에 혀를 내둘렀고, 게임보이를 이용하거나 오락실에 가서 줄기차게 캐딜락(본래 이름은 '캐딜락 앤 다이너소어')을 해댔으며, 문방구에서 파는 농구대잔치 스티커를 종류별로 모으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가하면 인조인간 18호의 가족애에 감동하기도 했다. 서태지와 아이들의 말대로 결코 시간은 멈춰지지 않을 거다ㅡ 그렇기 때문에야말로 저 옛날 기억을 끄집어내 떠벌리고픈 욕구는 더욱더 강해진다. 쓸모없는 것의 쓸모라고는 말하고 싶지 않고, 다만 그 시절 우리가 열광하고 마음을 주었던 것들에 대한 소박하고도 거창한 소회 정도라고 보면 될 듯싶다. 인간 김봉석이 어떻게 살아왔는가를 말하고 있긴 하지만 동시에 내가 지내 온 것들에 대한 경이로운 이야기이기도 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