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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_롱

『가다라의 돼지』 나카지마 라모 (북스피어, 2010)


기 『가다라의 돼지』에서의 잃어버린 8년은 평범한 아이를 ‘바나나 키시투’로 변용케 했다(‘변용’이라니 굉장히 무심한 말이지만 어쨌거나 그렇다고 하자). ……시작은 거창해 보이는 말로 운을 떼었지만 돌이켜보면 참으로 많은 결점을 지닌 작품이다. 그런데 이렇게나 ‘풍부하고 우스꽝스러운’ 단점들을 품었음에도 나는 나카지마 라모의 작품들을 좋아한다. 왜? 희한한 재미를 지니고 있으니까. 교고쿠 나쓰히코의 소설이 ‘이 세상에 이상한 일이란 없다’란 논의를 주장한다면 『가다라의 돼지』는 정반대에 서있다(등장인물인 미스터 미러클은 별개로 하자). 한마디로 소설은 주술(呪術)로 시작해서 주술로 끝난다. 그러고 보니 ‘주(呪)’, 한자에 입[口]이 들어가 있다. 쿠미나타투 마을의 주술사 오냐피데는 이렇게 말한다. 「언어야말로 모든 것이다. 인간은 자신의 영혼을 뜯어 밖으로 내던진다. 그게 바로 ‘말’이다.」 ‘밖으로 내던진다.’라고. 일본어로 ‘말하다(話す)’ 와 ‘풀어놓다, 놓아주다(放す)’는 발음이 같다. 우리말은? ‘주문을 왼다’, ‘주문을 걸다’, 곧 ‘말을 걸다’(어처구니없는 비약이려나?). 비트겐슈타인(Ludwig Wittgenstein)의 각기 다른 저작에서의 두 문장을 살펴보자. 「서로 화해될 수 없는 두 원리가 실제로 마주치는 곳에서 각자는 타자를 바보니 이단자니 하고 선언한다.」 「실제 언어를 조금 더 면밀하게 검토하면 할수록 그것과 우리의 요구 사이의 갈등은 더 첨예해진다.」 과연 주술이나 말 따위의 기생충이 득시글거리는 인간이란 숙주에겐 피할 수 없는 이니시에이션인가보다. 격자문 안에 얼룩말 한 마리를 넣고 제각각 앉아있는 각도에 따라 백마니 흑마니 난리를 피운다는 바키리의 말도 고개를 주억거리게 한다. 텔레비전으로 타자의 ‘말’을 듣는 인간은 제 코피도 보기 싫은 주제에 타인의 피에 굶주려 있다. 이로써『가다라의 돼지』는 뭔가 끈적끈적하고 사위스런 분위기를 만들어냈다. 끝의 스튜디오에서의 장면은 영화 《박수칠 때 떠나라》의 냄새도 좀 나고. 자, 그런데 이제 이 작품의 어처구니없는 것들이 스멀스멀 기어 나오기 시작한다. 아키야마 루이로 시작된 플라시보 효과로 왠지 이야기 전체를 묶어버리는 듯한 느낌도 들고, ㅡ 뭐든 마음먹기에 달렸다, 인가. 이제 와서 이런 말은 참 속편한 논리다. 이래서야…… ㅡ 그간 죽은 사람들에 대한 제대로 된 술회도 나오지 않으며, 거의 신적으로 묘사됐던 바키리는 결말에서 단 한방에 끝난다(이거야 원). 게다가 조상 오 오우베의 힘이 오우베 교수에게 있다는 것도 느닷없는 부분이고, 마가이가 갑작스레 마약을 하는 것도 개연성에서 벗어나 있다. 정말 허무한 퇴장이다. 하다못해 사이코패스도 그것만으로도 범죄의 동기는 될 수 있을 텐데 말이지. 나카지마 라모는 이런 식이다. 진드기가 식어가는 숙주의 몸에서 그 죽음을 알아차리고 홀연히 빠져나가듯 그 모습만을 보여준다. 개미가 개미인 것처럼, 사람이 사람인 것처럼 그 이상을 바라지 말라는 법칙. 베르그송(Henri Bergson)처럼 설탕이 녹기까지 기다려야만 하나. 누구든 진리는 알고 싶어 하니까? 시간은 관념적인 게 아니라 체험적인 것이니까? 마음대로 늘일 수도 없고 줄일 수도 없으니까? 그래서(그럼에도) 이런 ‘(말도 안 되는)자유분방’한 점도 다소 애교로 봐줄 수 있다. 뭐, 작가가 나카지마 라모니까, 하는 식은 아니어도, 다른 사람이 썼다면 정말 기교 있고 ‘멀쩡한’ 결말로 이끌어나갔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시 한 번 앞서 언급한 부분들을 단점이라고 했음에도 왠지 이 작품은 이렇게 끝나는 것이 매력적이라고 여기게 된다.


덧) 인용이 너무 과했나!? (그리고 한 가지 더. 757페이지로 이 책은 끝이 나지만 적어도 1,000페이지였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