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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_롱

『더블린 사람들』 제임스 조이스 (열린책들, 2013)


더블린 사람들 - 8점
제임스 조이스 지음, 이강훈 옮김/열린책들


은 조이스 자신이 도피자이고, 더블린과 떨어져 있으면서도 더블린 사람들이여야만 했다. 그 스스로가 '더블린이라는 도시가 마비의 중심이라고 느껴졌기 때문에 더블린을 배경으로 선택했다'고 밝힌 것은 다른 의미 없이 문자 그대로이다. 『더블린 사람들』을 관통하는 것은 종교적이며 비종교적이고, 허무적이되 허무만을 좇지 않았으며, 도시를 보여주고 있지만 도시의 세련됨은 찾아볼 수 없는 마비라는 안개에 둘러싸인 은밀한 상징이다. 그러므로 어떤 의미에서 『더블린 사람들』의 주인공은 사람들이 아니라 더블린 그 자체일 것이다 ㅡ 더군다나 이는 「위원회 사무실의 담쟁이 날」에서 하인스가 암송하는 <파넬의 죽음>만 보더라도 쉽게 알아챌 수가 있다. 조이스가 고독과 허무에 익숙했던가? 그가 발광한 적이 있었나? 아니면 두 다리가 결박되어 정신적으로 더블린을 벗어날 수 없었을까? 무엇이 진실이고 어떤 것이 거짓이든 간에 그는 일단 고통과 번민에서 벗어나기 위해 최초로 시행되어야만 할 병의 자각을 충실히 한 셈이다. 적어도 환상에 매달려 욕망이나 환멸 자체를 무너뜨리지는 않았으니. 이 책이 출간되었을 당시 더블린의 한 독자가 초판 부수를 모두 사들여 태워버리는 사건이 발생한 적이 있다는데, 그것은 아마도 조이스가 자신의 조국을 떠나 망명했다거나 가톨릭에 대해 맹렬한 비난을 퍼부은 것에 대한 부정적인 반응이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가 시도한 은밀한 것들을 들춰내는 방식은 썩은 환부를 도려내지는 못할지언정 각성의 계기를 마련할 수 있다는 점에서 외려 칭찬받아야 마땅하다. 때로 『더블린 사람들』에게 가해지는 공격은 으레 결말의 증발이라는 측면에서 찾아볼 수 있을 듯하다. 그러나 어차피 모든 단편의 귀착점이 특정한 하나의 점(그것을 지향했더라도)을 향해 있지는 않겠다는 견지를 취했으므로 그것이 아무리 모호하든 비난의 대상은 되지 못할 것이다. 앞에서 언급했듯 우리가 『더블린 사람들』에서 알아낼 수 있는 것은 묘사 외에 (거의)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늘 따라다니는 '에피퍼니'라는 수식어의 의미 또한 명백하지 않다. 나는 우스꽝스럽게도 『더블린 사람들』이 갖는 의미를, 『율리시스』 읽기를 두려워하기에 앞서 도전할 만한 과제라고 여기고 있다. 그중에서도 마지막 단편 「죽은 사람들」이야말로 조이스의 멋진 시작점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