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책_롱

『겨울 일기』 폴 오스터 (열린책들, 2014)


겨울 일기 - 6점
폴 오스터 지음, 송은주 옮김/열린책들


문장은 이렇게 시작한다. 「당신은 그런 일이 당신에게 절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일어날 리 없다고,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일어나도 당신에게만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여기에 이어질 내용으로 나는 다음과 같은 문장을 만든 바 있다. 「겨울철 빙판이 되어버린 2차선 도로에서 한바탕 신 나게 구른 뒤, 기어 봉에 눈두덩을 찧어 의안을 착용하게 된 달갑지 않은 사건만 하더라도 어떤가. 보라, 결국 그렇게 될 일은 일어나기 마련이다.」 우습지만, 당연하게도 『겨울 일기』에 이러한 잔인함은 없다. 사실 잔인한 묘사가 없을 뿐이겠지만. 이것을 쓰는 것이 여타 소설에 손을 대는 것보다 몇 갑절은 더 힘들었을 걸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ㅡ 그토록 사랑해 마지않던 우연이란 것을 버리고서(완전히 소거하지는 않은 것처럼 보인다) 실제로 존재했던 과거를 끄집어내야 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것을 고통이라 부르든 쾌감이라 부르든 문제될 것이야 없겠으나, 오랜 시간 퇴적된 땅끝을 향해 달리다가 문득 기암괴석이라도 하나 툭 튀어나올라치면 조금의 여유도 없이 소스라치게 되질 않던가. 이 감각, 정서적 반응, 신체 일부분이 기억하고 있는 것, 규정할 수 없는 잊힌 관계 들이 스스로를 사로잡게 되는 순간 그것이 제 주인으로 하여금 치명상을 입게 할 수도 있으니 말이다. 수백 개의 편린이 모인 능숙한 작가의 이 차분한 일기는 차라리 소설이라 불러도 좋을는지 모른다(나는 이것을 자서전으로 위장한 소설이 아닐까 하고 의심하고 있다). 그는 자신을 '당신'으로 내세우고 몰아붙여 거리 한복판으로 던져서는, 스스로가 난자당하는 것을 기꺼이 받아들인다. 구태여 1인칭 기술을 택하지 않은 것은 아마도 설득과 변명의 여지를 최소화하기 위함이리라. 지치지 않는 성적 흥분으로 매달 북미의 자위 기록을 갱신했던 어린 날의 폴 오스터는 ㅡ 로베르토 볼라뇨 왈, 「들어 보라. 음경이 발기했을 때 길이가 적어도 30센티미터는 되는 사람들이 자기 얘기를 쓰는 한, 나는 자서전에 대해서는 어떤 반감도 갖지 않는다.」 ㅡ 이제 일흔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었다(크기는 차치하고라도 상상과 사유는 죽지 않을 것이다). 그의 표현대로 ㅡ 마루 위에서 점프하는, 따뜻한 욕조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호우 속을 우산도 없이 걸어가는, 공책에 글을 쓰면서 책상과 탁자에 발을 올리고 의자를 뒤로 젖히고 앉은, 타자기 위로 웅크린, 이제 자신에게 몇 번의 아침이 남았을까 하고 자문해보는, 작가 폴 오스터의 한평생. 그가 말한 몸의 음악이 이제 겨울 악장으로 들어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