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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_롱

『학살의 기억, 관동대지진』 강덕상 (역사비평사, 2005)


학살의 기억, 관동대지진 - 10점
강덕상 지음, 김동수.박수철 옮김/역사비평사


본 극우세력의 혐한 시위가 그저 일상이 되어버린 것 같은 때에, 엊그제 뉴스를 통해 또 하나의 뜨악한 보도를 접했다. 얼마 전 산사태가 발생한 일본 히로시마에서 한국인과 중국인들이 빈집 털이를 하고 있다는 유언비어가 나돈다는 것이다. 『학살의 기억, 관동대지진』을 집어 들고 한창 읽어나가는 와중에 90년 전 일어난 일이 지금 다시 겹쳐지고 있다는 사실은, 당시의 지진 이래로 일본이 갖는 한국에 대한 인식이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는 것을 주지한다. 지금 일본은 관동대지진이 있었던 1923년 당시를 기해 매년 9월 1일을 방재(防災)의 날로 지정해서 피난 훈련 등을 실시하고 있다. 그러나 우스꽝스럽게도 그때의 학살은 제쳐두고 있는 실정이다. 1923년 관동대지진이 발생했을 때 일본은 불령선인(不逞鮮人, 일본의 식민통치에 반발심을 갖고 소요 등을 일으킬 염려가 있는 조선인)이란 말로 조선인들을 차별했다. 그리고 곧 <조선인이 방화를 했다 / 우물에 독을 풀어 넣었다>와 같은 유언비어가 떠돌기 시작했다. 일본 군부는 특히 재해가 일어난 1일부터 즉각적으로 '폭동을 일으킨 조선인'이란 표현을 쓰면서 군인들에게 실탄을 지급하고 총기에 착검할 것을 명령했다. 그러나 위의 유언비어와 같은 사실을 목격했다거나 방화범의 검거가 확인된 적은 없었으며 증거 또한 밝혀지지 않았다. 그러니 당연히 '조선인이 폭동을 일으켰다는 유언비어를 들었다'는 내무대신 미즈노 렌타로(水野錬太郎)의 말은 믿음이 가질 않는다. 스스로가 '유언비어'라 발언했음에도 불구하고 내무대신이라는 자가 그 유언비어에 편승한 것밖에는 되지 않는 까닭이다. 이것은 3.1운동을 기점으로 조선 독립운동에서 고조되었던 사회주의 노선을 잠재우기 위한 술책으로 보아도 무방하지 않을까. 실제로 당시 발생한 한두 건의 방화를 두고서 급속히 확산된 유언비어가 결국엔 계엄령으로 이어졌고, 훗날 조선인의 학살과 사회주의자 색출이라는 두 갈래의 노선이 드러난 것을 보면 그렇다.





대지진으로 도쿄 시내는 피난민 등의 혼잡이 극심한 형세였는데 내지인과 조선인을 구분하기 어려우므로 말씨가 분명치 않은 자를 조선인이라 하고, 무리를 이룬 피난민을 보고서는 '불령선인' 단체라고 속단했으며, 조선인 노동자가 고용주의 인솔 하에 작업장으로 가는 것을 '조선인 무리의 습격'이라고 잘못 믿어버리는 등의 사례가 많았다. 9월 2일 오후 3시경 자경단원이 고마고메(駒込) 경찰서로 끌고 가 폭탄과 독약을 소지한 조선인을 조사해본 결과, 폭탄이라고 한 것은 파인애플 깡통이었고 독약이라고 한 것은 사탕이었다.


― 일본 군부의 「계엄령에 관한 연구」에 나오는 대목 (본문 p.108)




허구의 범죄로 의심되는 보고도 무척 많았는데, 이런 것은 한두 건이 아니므로 전부 열거할 수는 없다. 다만 눈에 띄게 앞뒤가 맞지 않는 사실 중의 하나로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지진이 발생한 당일(9월 1일), 요코하마께 사는 야마구치 세이켄이라는 자가 피난민들을 모아놓고서 조선인들이 밤에 일본인을 습격하려 한다는 설이 있으니 서로 경계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취지의 선전을 했다고 한다. 그런데 니시자카 가쓰토라는 경찰고등과장의 진술은 이와 약간 다르다. 그는 9월 2일 오전 5시경 야마구치 세이켄에 대한 보고를 접해 현장에 나갔는데, 부근 이재민들을 모아 식량자급 방법에 관해 연설하고 있었다고 판단되어 불온한 언동을 해서는 안 된다며 경고하고 돌아왔다는 것이다. 저자는 이 두 가지 서로 다른 내용을 의심한다. 바로 일시의 차이이다. 야마구치라는 자는 당국에 '유언비어는 9월 1일 밤 8, 9시경 이후에 들었다'고 진술했단다. 그렇다면 그가 열었다는 피난민대회는 언제 있었던 것이며, (무리해서 본다면) 나아가 실제로 그런 일이 있었는가 하는 점도 의심된다. 나중에 야마구치 세이켄은 폭동을 일으켰다는 조선인 두목으로 바뀌어 졸지에 희생양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논란에 저자는 여러 가지 가능성을 든다. 유언비어가 일본인들이 가지고 있었던 편견과 조선인 멸시관 등에서 발생했을 수 있다는 것, 실제로 있었던 사소한 조선인 범죄를 침소봉대하여 소란을 야기했을지 모른다는 점 등이다.



이 유언비어에 앞서 책에서 소개되고 있는 일본 관헌이 조선인을 다루었던 방식도 희한하다. 한국병합 후 일본에 상륙한 조선인은 일정 양식의 명부에 등록해야 했는데, 이것과 관련해 고안된 「조선인 식별자료에 관한 건」이란 것이 있다. 잠깐 언급해보자면 이런 식이다. ①골격과 외모: 신장은 내지인과 차이가 없으나, 자세가 바르고 허리나 등이 굽은 자가 별로 없음. / 뒷머리는 목침을 사용하기 때문에 대체로 납작함. ②예식과 음식: 인사를 나눌 때 웃어른은 짐짓 의젓한 태도를 보이려는 습관이 있고, 아랫사람이 어른을 대할 때는 엉덩이를 뒤로 빼고 몸을 구부리는 습관이 있음. / 책상다리를 할 때 왼발을 오른발 위에 올리고 무릎과 무릎을 교차시키는 것이 일반적임. / 부인을 정면에서 보지 않고 측면에서 보는 습관이 있음. ③풍속: 얼굴을 씻을 때는 먼저 양손을 충분히 씻은 후에 얼굴을 씻음. ④코를 풀 때 종이를 쓰지 않고 아무 곳에서나 손으로 푼 다음 기둥이나 기타 식물의 잎사귀 등에 거리낌 없이 이를 닦는다. / 서류(증명서나 편지 등)를 보관할 때는 아주 작게 접어 돈 주머니나 봉지 속에 넣어두는 풍속이 있음. ㅡ 정말이지 면밀한 관찰이라고 해야 할지 황당무계하다고 해야 할지 알쏭달쏭한 대목이며, '멸치가 물고기인가 조선인이 인간인가'라는 말이 있었을 정도로 조롱과 차별 속에서 살았던 조선인들의 처우가 더욱 안타까울 따름이다. 피난민 무리를 오인하고, 불령선인이라는 낙인을 찍어 '죽여도 좋다'는 식의 태도를 취하고, 관헌이 자경단을 부추겨 조선인을 학살케 하고, 매스컴이 그런 당국의 확성기 역할을 하고……. 관헌이 교사/하청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재향군인회, 소방대, 청년단 등의 자경단은 거주 지역의 화재나 도둑 수색 등의 본래의 임무를 벗어나 엽총, 일본도, 몽둥이, 도끼, 죽창 등을 가지고서 조선인들을 마음대로 죽였다(살인 방식 또한 잔인무도하기 짝이 없었다). 그러나 후에 자경단은 관헌에 의해 돌연 팽(烹) 당하고 만다. '유언비어는 거짓말이었고 학살은 큰 실책이었다'는 비판을 받게 될 것을 예견한 관헌이 수많은 자경단원 중에서 '불량스런' 자경단을 표적으로 삼아 검거하여 국가범죄를 은폐하기 위한 대리범죄자로 만들어간 것이다.(p.234)





일본 관헌은 관동대지진 때 벌어진 조선인 학살에 관한 각종 서류(의 수치)를 주먹구구식으로 작성했으며 나중에는(유언비어가 그저 유언비어에 불과하다는 것이 드러난 뒤) 조선인들을 불령(不逞)과 양(良)으로 구분하는가하면 도로 정비와 동포의 사체 처리에 조선인들을 강제로 사역했다. 그들은 영문도 모른 채 일반 이재민들과 학살된 조선인들을 한데 모아 혼조(本所)에 있는 피복제조장 터를 사체처리장 삼아 불태우는 데 동원되었다. 또한 일본정부는 조선인을 보호한다는 명분 아래 도쿄 부근 조선인을 나라시노 포로수용소에 수용해 전시 포로 취급을 하기에 이른다. 강제수용소에 있던 조선인들에게는 면회의 자유, 통신의 자유, 심지어 귀국의 자유마저도 주어지지 않았다. 조선인 학살로 시작된 것은 사회주의자 색출과 말살로 이어졌고, 이 나라시노 수용소는 조선인 '주의자'를 색출해내는 데 적당한 밀실로 작용했다. 재해 아래에서의 민족박해가 이데올로기 말살책으로 확대된 셈이다.(p.302-307) 그리고 이 무시무시한 백색테러는 지금도 똑같은 장소에서 벌어지고 있을는지 모른다. 관헌이 자경단에게 조선인을 떠넘겨 학살케 하도록 선동한 것처럼, 현재 아베 정권의 망언에 영향을 받는 (극우) 일본인들은 또 얼마나 많겠는가. 이것은 마쓰모토 세이초의 소설 같은 사회파 추리소설의 일부분이 아니다. 실제로 발생한 사건이며 잊어서는 안 되는 역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