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평민열전 - 허경진 지음/알마 |
신분질서의 편재로 피지배계급에 속했던 평민은 임진왜란을 기점으로 부각되었을 것이다. 집권층의 무능력으로 시작된 당파 싸움과 몰락하는 양반의 바람 속에서, 그들은 여러 분야에 걸쳐 다양한 모습으로 그려지기 시작했다. 서로 글자를 가르치거나 한시를 짓는가하면 그림 하나만으로 임금의 눈에 띄기도 했다. 지금과 비교해보면 계급이 더욱 뚜렷한 것을 제외하고는 외려 능력 있는 인물이 인정받을 수 있는 기회가 더 많았던 것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최근 방영되었던 드라마에서 말[馬]을 고치는 인물로 등장한 백광현, 영화로도 만들어진 장승업의 이야기, 또 제주 태생 김만덕 등이 바로 그들이다. 『조선평민열전』은 이러한 19세기 평민들의 삶을 직업에 따른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절반씩 소개하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당시의 일화뿐 아니라 그 시대 사람들의 표현력 또한 들 수 있는데, 이옥(李鈺)은 문집 『문무자문초(文無子文鈔)』에서 바둑을 잘 두었던 정운창(鄭運昌)이란 자의 바둑돌 내려놓는 것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포위하는 것은 성채 같고 끊는 것은 창끝 같았으며 세우는 것은 지팡이를 짚은 것 같고 합치는 것은 바느질한 것 같았다 (...) 함정에 빠뜨리는 것은 도끼 구멍에 끼우는 것 같고 변화하는 것은 용 같았으며 모이는 것은 벌 같았다.」 바둑 한 수 두는 것을 이렇게까지 거창하게 말할 것 있나 싶기도 하지만, 당시 사람들의 모습과 더불어 그것을 설명하고 묘사하는 쪽의 시선 또한 이채롭다. 또 책을 파는 중개상(요즘으로 치면 헌책방이랄까?)인 조신선(曺神仙)이란 자 ㅡ 이름이 '신선(神仙)'이라는 것은 후에 스스로가 지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글을 읽으면 그의 괴짜 같은 면모를 볼 수 있으므로 ㅡ 는 이런 말을 했다 한다. 「세상에 책이 없어진다면 나도 달리지 않을 테고, 세상 사람이 책을 사지 않는다면 나도 날마다 마시고 취할 수 없을 거요. 이는 하늘이 세상의 책으로 내게 명한 것이니, 내 생애를 책으로 마치려오.」 이 얼마나 기세등등한 모습인가. 조신선은 일종의 유통망에 속해 있는 사람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자신의 직업 정신 내지는 자부심이 지금의 사람들보다 몇 배는 강했던 것만 같다.
아, 물론 여기에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있다. 평민은 양반과의 물리적, 생리적 부딪힘에서 비로소 자신들의 이름을 알릴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는 점이다. 그들이 지배계급보다 뛰어난 능력을 보유하고 있어도 위에서 누르거나 인정하지 않으면, 대략적인 기록은커녕 목숨마저 잃을 지경이었을 테니 말이다. 또 피지배계급과 패자의 역사가 언제고 숨어버리고 마는 현상이 비단 저 옛날 사람들에게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질 않던가.